능선마다 같은듯 다른듯 삽시간의 저 황홀 어이할꼬… 스승 김영갑의 ‘용
2010. 6. 2. 21:22ㆍ사진·명화·풍경화·포토
능선마다 같은듯 다른듯 삽시간의 저 황홀 어이할꼬… 스승 김영갑의 ‘용눈이오름’
중산간의 깊고 푸른 어둠 속에서 용눈이오름이 윤곽을 드러냈다. 혹은 늙은 어머니의 젖무덤 같고 혹은 젊은 아낙의 둔부를 닮은 오름이다. 2005년 작고한 '바람의 사진작가' 김영갑이 20년 동안 올랐던 그 오름을 사흘 동안 다섯 번 올랐다. 김영갑의 마음을 빼앗은 바람의 실체는 무엇인가, 김영갑이 그토록 담고 싶어 했던 오름의 빛과 그림자는 무엇일까. 그의 눈길과 발길을 따라 용눈이오름 능선에 섰다. 김영갑의 사진에서 보았던 그 바람이 바싹 엎드린 야생화와 함께 격렬한 춤을 추고 있었다.
2001년 겨울에 댕기머리 노총각 김영갑을 우연히 만났다. 서귀포시 성산읍 삼달리의 삼달초등학교 폐교를 임대해 갤러리로 꾸미던 그는 오십견 때문에 무거운 카메라를 들 수 없다고 푸념했다. 그리고 사진 몇 장을 슬쩍 내밀었다. 그의 사진을 보는 순간 느닷없이 둔기로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사진을 이렇게도 찍을 수 있구나'하는 충격에 한동안 정신이 멍했다, 이듬해 봄에 지인을 통해 그가 오십견이 아닌 루게릭병에 걸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생명처럼 아끼는 나의 사진과 필름이 애물단지 취급을 받느니 차라리 병든 육신과 함께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이 명예롭겠지요…."
2004년 1월에 김영갑을 다시 찾았다. 근육이 마비된 채 폐교 골방에 누워 있던 그가 힘겹게 손을 내저었다. 가까이 오지 말라는 의사표시였다. 어두침침한 골방에서는 지린 냄새가 진동했다. 그가 20년 동안 촬영한 슬라이드 필름은 30만 롤. 분신이나 다름없는 사진과 필름을 남겨두고 떠나야한다는 생각에 눈시울이 뜨거워지더니 끝내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 1년 후. 그는 한줌의 재로 변해 자신이 심은 갤러리 정원 감나무 아래에 뿌려졌다.
다행히 그의 사진과 필름은 '삼춘'이라 부르며 따르던 제자 박훈일(김영갑갤러리두모악 관장)에 의해 건사되었다. 제자는 스승이 미완성으로 남겨둔 정원도 완성하고 바람처럼 살다간 스승의 사진전도 열었다. 갤러리는 당연히 제주 올레꾼들의 필수코스가 되었다. 마라도에서 처음 김영갑을 만났다는 이생진 시인은 김영갑의 사진에 일일이 시를 지어 '숲 속의 사랑'이란 사진전을 열었다.
"그대는 가고 '숲 속의 사랑'은 다시 세상에 나와 바람과 햇살 사이로 그대가 걸어오는 듯 나뭇잎이 흔들리네. 물안개가 시야를 가리던 어느 날, 날더러는 감자 밭에서 시를 쓰라 하고 그대는 무거운 사진기를 짊어지고 사라졌지. 나는 오도가도 못하는 오름 길에서 이슬비를 맞으며 찔레꽃을 보고 있었고. 시는 무엇이며 사진은 무엇인가. 나는 시로 사진을 찍지 못했지만 그대는 사진으로 시를 찍고 있었던 거야. 그런 생각을 하며 오늘도 오름에 올라가 그대의 발자취를 읽고 있네.' 이생진 시인이 올 봄에 용눈이 오름에 올라 쓴 '김영갑 생각'이다.
김영갑은 생전에 왜 그토록 용눈이오름에 집착했을까. 20년 동안 찍어도 다 못 찍었다는 용눈이 오름의 매력은 무엇일까. 김영갑의 용눈이오름 사진집을 들고 중산간 들판을 배회한다. 그는 어디서 이 사진을 찍었을까. 그가 이 사진을 찍었을 때는 하루 중 언제였을까.
김영갑갤러리두모악의 팜플릿에 실린 사진을 촬영한 곳은 의외로 삼나무와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오름 아래 목장이었다. 서너개의 비대칭 봉우리로 이루어진 용눈이오름이 이곳에서는 완벽하게 하나로 보였다. 처음 만난 김영갑이 이곳에서 찍은 사진 두 장을 보여주며 차이점을 찾아보라고 주문했다. 한 장은 10년 후에 찍은 사진이라고 힌트를 줬다. 그래도 대답을 못하자 오름 앞에 일렬로 늘어선 삼나무가 10년 전보다 조금 더 자랐다는 설명을 곁들였다.
용눈이오름의 빛과 그림자를 만나기 위해 감자밭을 지나 아직 지지 않은 찔레꽃이 하얗게 수를 놓은 탐방로를 올랐다. 기생화산인 용눈이오름은 3개의 분화구가 용의 눈을 닮아 이름 붙여졌다. 또는 용이 누워있는 모습이라고도 한다. 1960년대에 제주도를 찾은 한 권력자가 오름이 민둥산이라며 녹화를 지시했다고 한다. 그래서 심은 것이 숙대낭으로 불리는 일본산 삼나무. 속성수인 삼나무는 오름 본래의 경관을 해치고 식생마저 변화시켰다. 다행스럽게도 구좌읍 상달리마을의 공동목장인 용눈이오름은 방목을 위해 삼나무를 심지 않았다. 김영갑에게 무한한 예술적 상상력을 불러일으킨 원동력이 된 것이다.
주차장에서 용눈이오름 능선까지는 10분 거리. 능선을 한바퀴 도는 데도 20분이면 충분할 정도로 아담하다. 용눈이오름의 수많은 매력 중 하나는 능선 너머로 다랑쉬 오름, 둔지 오름, 따라비 오름 등 중산간의 크고 작은 오름과 한라산이 다정한 이웃처럼 겹쳐 보인다는 점. 눈을 서쪽으로 돌리면 멀리 성산일출봉과 섭지코지 등 제주도의 동쪽 해안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오름은 시시각각 변하는 풍경화다. 계절에 따라, 시간대에 따라, 보는 위치와 각도에 따라 순식간에 모습을 달리한다. 여기에 태양이 오름과 함께 창조하는 빛과 그림자의 조화 등 경우의 수를 더하면 평생을 찍어도 용눈이오름의 모든 속살을 카메라에 담을 수 없다.
"중산간 광활한 초원에는 눈을 흐리게 하는 색깔이 없다. 귀를 멀게 하는 난잡한 소리도 없다. 코를 막히게 하는 역겨운 냄새도 없다. 입맛을 상하게 하는 잡다한 맛도 없다. 마음을 어지럽게 하는 그 어떤 것도 없다. 나는 그런 중산간 초원과 오름을 사랑한다."
김영갑은 '그 섬에 내가 있었네'라는 책에서 눈으로 보아도 보이지 않고, 귀로 들어도 들리지 않고, 잡으려 해도 잡을 수 없는 것. 형상도 없는데 사람을 황홀하게 하는 그 무엇이 중산간 광활한 초원에 존재한다고 말했다. 특히 그는 선이 부드럽고 볼륨이 풍만한 오름에서 오르가슴을 느꼈다고 고백했다.
용눈이오름의 능선과 분화구는 어머니의 치맛자락처럼 부드럽다. 태양을 품어 평면으로 보이던 용눈이오름 너머로 해가 기운다. 밋밋하던 평면에 드디어 빛과 그림자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마치 아프리카의 나미브사막 모래언덕처럼 빛과 그림자가 강한 생명력으로 살아 꿈틀댄다. 김영갑은 이 장면을 찍기 위해 하루에도 몇 차례 용눈이오름을 올랐던 모양이다.
김영갑의 5주기였던 지난 5월 29일. 옅은 안개에 둘러싸인 용눈이오름을 마지막으로 올랐다. 그리고 그곳에서 김영갑갤러리두모악에 전시된 사진 한 장과 비슷한 분위기의 장면을 만났다. 제자 박훈일이 용눈이오름 능선에서 찍은 스승의 사진이다. 그는 실수로 필름 한 장에 무표정한 얼굴로 능선을 걷는 김영갑을 두 번 찍었다. 그리고 혼이 날까봐 꼭꼭 숨겨두었던 사진이다.
해가 지자 바람이 더욱 거세진다. 순간 용눈이오름 저편 능선이 연분홍으로 붉게 물든다. 김영갑을 미치게 했던 '삽시간의 황홀'이다.
"생명처럼 아끼는 나의 사진과 필름이 애물단지 취급을 받느니 차라리 병든 육신과 함께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이 명예롭겠지요…."
2004년 1월에 김영갑을 다시 찾았다. 근육이 마비된 채 폐교 골방에 누워 있던 그가 힘겹게 손을 내저었다. 가까이 오지 말라는 의사표시였다. 어두침침한 골방에서는 지린 냄새가 진동했다. 그가 20년 동안 촬영한 슬라이드 필름은 30만 롤. 분신이나 다름없는 사진과 필름을 남겨두고 떠나야한다는 생각에 눈시울이 뜨거워지더니 끝내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 1년 후. 그는 한줌의 재로 변해 자신이 심은 갤러리 정원 감나무 아래에 뿌려졌다.
다행히 그의 사진과 필름은 '삼춘'이라 부르며 따르던 제자 박훈일(김영갑갤러리두모악 관장)에 의해 건사되었다. 제자는 스승이 미완성으로 남겨둔 정원도 완성하고 바람처럼 살다간 스승의 사진전도 열었다. 갤러리는 당연히 제주 올레꾼들의 필수코스가 되었다. 마라도에서 처음 김영갑을 만났다는 이생진 시인은 김영갑의 사진에 일일이 시를 지어 '숲 속의 사랑'이란 사진전을 열었다.
"그대는 가고 '숲 속의 사랑'은 다시 세상에 나와 바람과 햇살 사이로 그대가 걸어오는 듯 나뭇잎이 흔들리네. 물안개가 시야를 가리던 어느 날, 날더러는 감자 밭에서 시를 쓰라 하고 그대는 무거운 사진기를 짊어지고 사라졌지. 나는 오도가도 못하는 오름 길에서 이슬비를 맞으며 찔레꽃을 보고 있었고. 시는 무엇이며 사진은 무엇인가. 나는 시로 사진을 찍지 못했지만 그대는 사진으로 시를 찍고 있었던 거야. 그런 생각을 하며 오늘도 오름에 올라가 그대의 발자취를 읽고 있네.' 이생진 시인이 올 봄에 용눈이 오름에 올라 쓴 '김영갑 생각'이다.
김영갑은 생전에 왜 그토록 용눈이오름에 집착했을까. 20년 동안 찍어도 다 못 찍었다는 용눈이 오름의 매력은 무엇일까. 김영갑의 용눈이오름 사진집을 들고 중산간 들판을 배회한다. 그는 어디서 이 사진을 찍었을까. 그가 이 사진을 찍었을 때는 하루 중 언제였을까.
김영갑갤러리두모악의 팜플릿에 실린 사진을 촬영한 곳은 의외로 삼나무와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오름 아래 목장이었다. 서너개의 비대칭 봉우리로 이루어진 용눈이오름이 이곳에서는 완벽하게 하나로 보였다. 처음 만난 김영갑이 이곳에서 찍은 사진 두 장을 보여주며 차이점을 찾아보라고 주문했다. 한 장은 10년 후에 찍은 사진이라고 힌트를 줬다. 그래도 대답을 못하자 오름 앞에 일렬로 늘어선 삼나무가 10년 전보다 조금 더 자랐다는 설명을 곁들였다.
용눈이오름의 빛과 그림자를 만나기 위해 감자밭을 지나 아직 지지 않은 찔레꽃이 하얗게 수를 놓은 탐방로를 올랐다. 기생화산인 용눈이오름은 3개의 분화구가 용의 눈을 닮아 이름 붙여졌다. 또는 용이 누워있는 모습이라고도 한다. 1960년대에 제주도를 찾은 한 권력자가 오름이 민둥산이라며 녹화를 지시했다고 한다. 그래서 심은 것이 숙대낭으로 불리는 일본산 삼나무. 속성수인 삼나무는 오름 본래의 경관을 해치고 식생마저 변화시켰다. 다행스럽게도 구좌읍 상달리마을의 공동목장인 용눈이오름은 방목을 위해 삼나무를 심지 않았다. 김영갑에게 무한한 예술적 상상력을 불러일으킨 원동력이 된 것이다.
주차장에서 용눈이오름 능선까지는 10분 거리. 능선을 한바퀴 도는 데도 20분이면 충분할 정도로 아담하다. 용눈이오름의 수많은 매력 중 하나는 능선 너머로 다랑쉬 오름, 둔지 오름, 따라비 오름 등 중산간의 크고 작은 오름과 한라산이 다정한 이웃처럼 겹쳐 보인다는 점. 눈을 서쪽으로 돌리면 멀리 성산일출봉과 섭지코지 등 제주도의 동쪽 해안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오름은 시시각각 변하는 풍경화다. 계절에 따라, 시간대에 따라, 보는 위치와 각도에 따라 순식간에 모습을 달리한다. 여기에 태양이 오름과 함께 창조하는 빛과 그림자의 조화 등 경우의 수를 더하면 평생을 찍어도 용눈이오름의 모든 속살을 카메라에 담을 수 없다.
"중산간 광활한 초원에는 눈을 흐리게 하는 색깔이 없다. 귀를 멀게 하는 난잡한 소리도 없다. 코를 막히게 하는 역겨운 냄새도 없다. 입맛을 상하게 하는 잡다한 맛도 없다. 마음을 어지럽게 하는 그 어떤 것도 없다. 나는 그런 중산간 초원과 오름을 사랑한다."
김영갑은 '그 섬에 내가 있었네'라는 책에서 눈으로 보아도 보이지 않고, 귀로 들어도 들리지 않고, 잡으려 해도 잡을 수 없는 것. 형상도 없는데 사람을 황홀하게 하는 그 무엇이 중산간 광활한 초원에 존재한다고 말했다. 특히 그는 선이 부드럽고 볼륨이 풍만한 오름에서 오르가슴을 느꼈다고 고백했다.
용눈이오름의 능선과 분화구는 어머니의 치맛자락처럼 부드럽다. 태양을 품어 평면으로 보이던 용눈이오름 너머로 해가 기운다. 밋밋하던 평면에 드디어 빛과 그림자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마치 아프리카의 나미브사막 모래언덕처럼 빛과 그림자가 강한 생명력으로 살아 꿈틀댄다. 김영갑은 이 장면을 찍기 위해 하루에도 몇 차례 용눈이오름을 올랐던 모양이다.
김영갑의 5주기였던 지난 5월 29일. 옅은 안개에 둘러싸인 용눈이오름을 마지막으로 올랐다. 그리고 그곳에서 김영갑갤러리두모악에 전시된 사진 한 장과 비슷한 분위기의 장면을 만났다. 제자 박훈일이 용눈이오름 능선에서 찍은 스승의 사진이다. 그는 실수로 필름 한 장에 무표정한 얼굴로 능선을 걷는 김영갑을 두 번 찍었다. 그리고 혼이 날까봐 꼭꼭 숨겨두었던 사진이다.
해가 지자 바람이 더욱 거세진다. 순간 용눈이오름 저편 능선이 연분홍으로 붉게 물든다. 김영갑을 미치게 했던 '삽시간의 황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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