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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계서열, 지각변동 ‘들썩’

송평(松平) 2009. 10. 29. 19:14

재계서열, 지각변동 ‘들썩’

 

ㆍ올 자산총액 기준 삼성 부동 1위…5위권 SK·롯데 변수

지난 10여 년 동안 한국 재계는 격변의 시간을 보냈다. '건국 이래 최대 위기'라 불린 1997년 IMF 사태는 '대마불사'로 여겨지던 대그룹을 하나 둘 무너뜨렸고, 이후 시대와 경제 환경의 변화에 따라 사업의 속도와 방향을 맞추지 못한 기업은 언제든지 침몰했다. 이때 '세계경영'을 외치던 대우가 몰락했고, '왕자의 난'으로 현대그룹은 분열했다. 동아건설, 해태, 거평, 한라 등의 침몰은 재계 판도를 급변시켰다.

↑ 재계 서열은 대통령과 지근거리를 상징하기도 한다. 그만큼 총수의 발언 또한 무게감이 달라진다. 지난해 청와대에서 열린 ‘투자활성화와 일자리 창출을 위한 민관 합동회의’의 모습. <청와대기자사진단>

그러나 어려움을 뚫고 살아남은 대기업들은 반도체, IT, 이동통신 등 새로운 먹을거리를 찾아내 한국경제를 뒷받침했다. 삼성은 10년 권좌에 앉았고, 현대기아차와 SK·LG·롯데의 5위 그룹 틀은 더욱 탄탄해졌다. 금호아시아나와 두산, 특히 STX의 서열은 급성장했다. 최근 이 같은 구도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지난 10년 동안의 재계 서열 변화를 보면 그룹의 흥망성쇠와 함께 향후 재계 판도가 보인다.(공기업과 민영화된 공기업은 재계 서열에서 제외했다-편집자 주)

"아직 그 계열사를 매각한 것은 아니니 재계 서열에선 저희가 앞섭니다. 기사 작성 때 꼭 유의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룹 3세들에 대한 취재 과정에서 접한 모 그룹 홍보팀의 요청이다. 그룹의 유동성 위기 탓에 올해 최대 인수합병(M & A) 물건을 시장에 내놓은 상태지만 그래도 그룹 후계자가 경쟁사 후계자에 밀리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 '당부'한 것이다.

재계 서열에 대한 반응은 그룹 총수들 안에서도 민감한 사안이다. 재계 안팎의 모임은 물론 대통령을 만나는 자리에서도 재계 서열대로 악수 순서와 자리 배치가 이뤄지고, 이 장면이 고스란히 매스컴을 통해 보도되기 때문이다.

지난 참여정부 시절엔 재계 3위 그룹 SK의 최태원 회장이 청와대에서 열린 대·중·소기업 상생협력회의에서 4위 그룹인 LG의 구본무 회장에게 자신의 자리를 양보한 일이 훈훈한 얘깃거리로 회자되기도 했다. 당시 재계 2위 기업인 현대차그룹의 정몽구 회장이 구속되면서 최 회장에게 자리 제의가 왔고, 이에 최 회장이 LG가 LS 및 GS와의 계열 분리로 자산 규모가 4위로 줄었지만 구 회장이 자신보다 경륜이 많은 재계의 대선배이기 때문에 1위인 이건희 삼성 회장 옆자리에 앉아야 한다고 청와대에 제의해 자리가 바뀐 것. 반면에 LG는 구 회장이 최 회장 다음 자리에 앉을 경우 총수의 위상이 떨어지는 이미지로 비쳐질까봐 전전긍긍하던 차에 최 회장 측의 배려로 고민이 일거에 해소되자 SK 측에 감사의 뜻을 전했다는 후문이다.


현대차 턱밑 추격 SK 분리 제안설


재계 서열은 공정거래위원회가 매년 4월에 발표하는 상호출자제한 기업집단 순위에서 산출한다. 공정거래위원회는 그해 3월까지의 자산총액이 5조원 이상인 그룹을 대상으로 재계 서열을 발표하고, 매달 그룹 소속 회사의 변동사항을 점검한다. 일정 기준이 넘으면 모두 선정하는 현재 방식과 달리 2000년대 초반엔 30위까지 지정토록 되어 있었기 때문에 5대 재벌과 30대 재벌의 표현이 많이 회자됐다. 간혹 주식을 바탕으로 한 시가총액으로 서열을 매기기도 하지만 이는 하루 자고 나면 달라지기 때문에 의미가 없다는 것이 재계의 이야기다.

재계 서열에 지각변동이 인 것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다. 당시 재계 서열 30위 가운데 대우(4위), 쌍용(6위), 기아(8위), 동아(13위) 진로(19위), 고합(21위), 해태(24위), 아남(26위), 한일(27위), 거평(28위) 등 10개 남짓의 그룹이 법정관리나 워크아웃 과정을 거치면서 해체됐다. 대우그룹의 경우 대우중공업은 두산에 넘어가고 대우건설은 금호에 팔리는 등 주인이 바뀌었고, 대우인터내셔널은 현재 매각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2000년대 들어 재계 서열은 '왕자의 난'에 이은 현대가의 분할로 격동이 일었다. 현대자동차가 현대로부터 친족분리하면서 당시 재계 1위이던 현대는 사세가 기울어 재계 서열에서도 2위(2001년), 7위(2002년), 9위(2003년), 12위(2004년·2005년), 14위(2006년), 15위(2007년), 19위(2008년)로 밀려났다. 1위 자리는 삼성이 대신했다. 삼성은 2001년 이후 올해까지 재계 톱을 유지하고 있다. 특히 지난해 144조4000억원이던 자산총액이 올해 174조9000억원으로 급증하면서 앞으로도 이 같은 판도는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2000년대 초·중반 2위 그룹인 LG가의 분할도 재계 서열에 영향을 미쳤다. 2005년 구씨의 LG와 허씨의 GS로 각자의 길을 걷게 되면서 이후 그룹은 LS와 LIG로 더욱 세분화됐다. 그러나 산업 전반에 미치는 영향력이 여전해 서열에서도 2009년 10월 1일 현재 4위(LG), 7위(GS), 15위(LS)를 각각 지키고 있다.

2000년대 초반에 삼성, 현대차, SK, LG, 한진이 형성했던 이른바 '재계 5대 그룹' 체제는 2006년 들어 한진이 빠지고 롯데가 들어섰지만 큰 틀에서는 더욱 공고해졌다. 하지만 최근 5대 그룹 내부에서 미묘한 서열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는 게 재계의 분석이다. SK그룹이 그 중심에 있다. 최근 최태원 회장의 사촌동생인 최창원 회장이 SK케미칼그룹, 사촌형인 최신원 SKC 회장이 SK네트웍스와 워커힐 양도 조건으로 사촌 간 계열분리를 제안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이와 관련한 각종 설이 등장하고 있다.


현금 풍부, 숙원사업 해결 롯데 '날개'


지난 1월 두산의 소주사업 부문을 인수한 롯데의 활약도 변수다. 오랫동안 비축한 풍부한 현금을 바탕으로 최근 기업 사냥과 새 산업 진출에 박차를 가하면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것. 새 정부 들어 20여 년 숙원이던 제2롯데월드 건립 사업을 허가받았고, 상당한 규모의 계열사 부동산도 각종 규제 완화와 개발계획 덕택에 가격이 치솟고 있다. '제2의 전성기'라는 말이 나돌 정도다.

2위와 3위 간, 6위와 7위 간인 자산 총액 격차가 준 것도 재계 서열 변화를 예상케 한다. 2009년 4월 1일 기준 현대차가 자산총액 87조원으로 재계 2위를 고수했지만 SK가 85조9000억원으로 차이가 1조1000억원에 불과해 지난해 10조원 이상 자산을 늘린 이들 기업으로서는 언제든 재계 서열이 바뀔 수 있는 상황이다.

잇달은 M & A 실패 등으로 현대중공업에 재계 6위를 내준 GS그룹도 그 차이가 1조9000억원에 불과한 상황이며, 바짝 뒤를 쫓고 있는 금호아시아나그룹도 GS그룹과의 격차가 1조4000억원에 불과해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올 한 해 경영에 따라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

재계 5위권의 그룹들이 비교적 안정적으로 서열을 유지하고 있다면 10위 안팎 그룹들의 서열은 상당히 유동적이다. 금호, 한진, 두산, 한화, STX 등이 엎치락뒤치락 서열 싸움을 하고 있는 가운데 그 중심엔 M & A를 통한 '퀀텀 점프(대도약)'가 존재한다.

특히 금호아시아나의 서열 상승은 놀랄 만하다. 2006년 대우건설과 지난해 대한통운 인수에 성공해 물류 라이벌 한진을 제치고 재계 8위에 오른 금호아시아나의 올해 총자산은 36조7000억원. 2007년 4000억원에 불과하던 두 그룹의 총자산 규모 격차는 7조6000억원까지 벌어지게 됐고, 금호아시아나는 현대중공업과 GS그룹을 경쟁상대로 삼게 됐다. 8위인 금호아시아나와 9위인 한진에 보이지 않는 선이 그어진 것이다.

M & A를 통한 그룹 키우기로는 단연 STX가 돋보인다. 2006년 재계 서열 23위에 첫 등장한 STX는 2007년 22위, 2008년 13위, 올해 12위로 급성장한 것. 쌍용양회에 평사원으로 입사해 근무하다가 외환 위기를 겪던 2000년에 쌍용중공업이 퇴출 기업으로 지정되자 인수 주체인 외국계 컨소시엄의 최고경영자(CEO)로 선임된 이후 창사 9년 만에 매출을 100배 이상 늘린 강덕수 회장의 성공은 재계의 큰 화제이기도 하다.

STX는 2001년 대동조선(현 STX조선해양)을 필두로 2002년 산단에너지(현 STX에너지) 인수에 나섰다. 이어 STX그룹 전체 매출 규모와 맞먹는 범양상선을 인수한 뒤 2007년에 세계 최대 크루즈선 건조회사인 아커야즈(현 STX유럽)까지 인수하며 기염을 토했다. 강 회장은 창립 10년도 안된 그룹 가운데 유일하게 올해 전경련 부회장단에 포함돼 그룹의 위상을 확인했다.


기업 인수합병 성패가 순위 관건


그러나 기업의 M & A가 반드시 달콤한 것만은 아니다. 미래를 예측하지 못한 지나친 M & A는 결국 그룹의 발목을 잡는다. 대표적인 사례가 또한 금호아시아나그룹이다. 금호아시아나는 지난 2006년에 건설업계 1위 대우건설을 인수하며 일약 재계 서열 11위에서 8위로 뛰어올랐다. 금호가 국내 건설업계 1위인 대우건설 인수에 들인 돈은 무려 6조4225억원이었다. '실탄'이 넉넉지 않았던 금호는 국내외 금융기관에 손을 벌렸고, 대우건설 주식 39.6%를 담보로 내놓고 3조5000억원을 빌렸다. 인수자금의 절반이 '빚'이었던 셈이다. 게다가 금호는 지난해 대한통운까지 사들였다.

결국 막대한 '빚'은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두 건의 M & A 뒤 금호아시아나의 유동성 위기설은 시장에서 공공연한 비밀이 됐고, 대우건설 매각 등 자구책을 썼지만 결국 대우건설 포기로 이어졌다. 이 뿐 아니라 유동성 확보가 충분치 않다고 판단해 금호생명, 고속버스터미널 등을 추가로 시장에 내놓은 상태다. 이 계열사들을 매각할 경우 금호아시아나의 자산 감소액은 10조원을 넘게 돼 한진, 두산은 물론 서열 11위인 한화(24조4670억 원)와도 순위를 놓고 다툼을 벌일 것으로 전망된다. 금호아시아나가 3년 만에 제 자리로 돌아가게 되는 씁쓸한 상황이 연출될지 재계의 관심이 크다.

공격적인 M & A로 몸집을 키워 온 두산그룹과 한화그룹의 명암도 엇갈렸다. 두산그룹도 꾸준한 M & A를 통해 지난해(약 17조원)에 비해 10조원 이상 자산을 늘린 27조3000억원으로 재계 10위에 오른 반면에 국내 M & A시장의 최대 이슈인 대우조선해양 인수에 실패한 뒤 3000억원의 이행보증금반납 소송에 나선 한화그룹은 두산에 자리를 내주고 11위로 밀려났다. 자산총액도 두산그룹에 비해 지난해 3조원 넘게 앞섰던 한화그룹이지만 올해는 오히려 3조원 가까이 뒤처졌다. 한화가 M & A하려던 대우조선해양은 재계 서열 20위권을 맴돌다가 올해 13위에까지 치고 올라왔다. 지난해 선박계약 선수금과 중도금 등이 들어오는 등의 성과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MB사돈 효성, 하이닉스 인수전 눈길


2010년 재계 서열을 흔들 '다크호스'는 효성이다. 효성은 지난달 하이닉스반도체 인수를 위한 의향서를 단독으로 제출함에 따라 유력한 인수 후보로 떠올랐다. 자산총액 8조원대로 기업 규모 24위(4월1일 기준)인 효성이 자산 13조원대의 하이닉스(14위) 인수에 성공하면 재계 서열 10위권 초반으로 도약하게 된다.

외환위기 이전에 재계 순위 15위이던 효성은 2004년 말 22개에 불과한 계열사 수를 41개까지 늘리며 사업 다각화에 나섰지만 2004년 대우종합기계(현 두산인프라코어), 2005년 대우정밀, 2007년 대한통운 인수전 등이 모조리 실패로 끝나면서 서열이 계속 떨어져 2007년엔 30위권 밖으로 밀리기도 했다. 이 때문에 업계에서는 효성이 마지막 대도약의 기회를 노린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특히 인수 실무팀을 진두지휘하는 인물이 조석래 회장의 장남인 조현준 효성 사장이라는 점에서 승부수를 던졌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이 밖에도 효성의 하이닉스 참여는 하이닉스 인수 때 경쟁하게 될 삼성과의 인연이 배경이 된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조홍제 효성그룹 창업주와 이병철 삼성그룹 선대회장은 삼성물산을 공동으로 창업했지만 갈라선 인연이 있다. 경영자의 능력이나 실력에서 밀릴 게 없었지만 삼성은 반도체에 뛰어들어 하늘과 땅 차이로 그룹의 차이가 벌어졌고, 이에 대해 선대 때부터 절치부심하던 효성이 뒤늦게라도 반도체 사업에 뛰어들며 도약을 꿈꾼다는 얘기다.

효성은 그룹 규모는 작지만 이명박 대통령과의 관계 때문에 현 정부 출범 이후 줄곧 주목을 받아 왔다. 조석래 효성 회장 동생인 조양래 한국타이어 회장의 둘째 아들 조현범씨(한국타이어 부사장)가 이 대통령의 사위이기 때문이다. 조석래 회장은 현재 전국경제인연합 회장도 맡고 있다.

하이닉스 인수가 성사될 가능성에 대한 시장의 평가는 일단 '두고 봐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보다 자산 규모가 두 배 가까이 큰 기업을 인수할 경우 후유증이 만만치 않을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4조원대로 추정되는 하이닉스 인수대금을 제대로 감당할 수 있겠냐는 의문도 제기된다. 효성의 2분기 말 기준 총 차입금은 2조1000억원에 이른다. 여기에 하이닉스 인수에 성공할 경우 8조6000억원 가량의 하이닉스 부채를 떠안아야 한다. 게다가 매년 1조~2조원의 설비투자도 부담해야 한다. 향후 금리 상승 가능성이 높다는 점도 걸림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