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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오사화(戊午士禍)

송평(松平) 2010. 4. 4. 11:41

<연산군일기>에 무오사화(戊午士禍)라 기록되어 있는

1498년 옥사(獄事) 속으로 들어가 보자.

 

조의제문(弔義帝文)으로 촉발된 옥사에서 김일손, 권오복, 권경유가 능지처참에 처해지고

이목, 허반 등은 참형을 당했으며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김종직은 墓가 파헤쳐지는 부관참시를 당했다.

 

희생이 컸다. 이러한 선비들의 희생은 연산의 선대인 세종 조나 세조 조, 그리고 성종 조에도 있었다. 하지만 부정적인 이미지의 사화(士禍)라 기록되어 있지 않다.

 

사화라 함은 피해를 입은 선비의 입장에서 화(禍)를 당했다는 의미가 크고 그 무게 중심이 희생당한 선비에게 쏠려있다.

 

그 성격도 그렇다. 무지몽매한 군주의 횡포에 의한 참극이나 학살극이 아니었다. 선대 태종시대부터 꾸준히 닦아 내려온 왕권(王權)에 신권(臣權)이 무모하게 도전하다 빚어진 참화였다.

 

                        

 

@IMG6@廢妃 尹氏墓. 중전에서 폐비가 되어 사약을 받고 거적데기 장례를 치렀으나 아들이 왕위에 오르자 왕후에 준하는 릉으로 조성되었다. 아들 연산이 폐위되자 다시 회묘로 위상이 추락한  폐비윤씨.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에 있으며 회묘라 부른다.

 

신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연산군이 폐비 윤씨의 사당 문제를 밀어붙이자

사간원을 비롯한 사헌부, 홍문관 등 삼사(三司)가 총동원되어

벌떼처럼 상소를 올리고 줄줄이 사퇴해 버렸다.

 

실록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신 등의 아뢴바 세 가지 일이 다 사소한 것이 아닌데도 모두 거절하고

받아들이지 않으시니, 이것은 신 등이 직책에 나가기 어려운 소이입니다”>

 (연산 2년 9월. 3가지 조건-유교(성종의 가르침),신주, 사당)

 

장마가 시작되는 5월부터 시작된 기 싸움은 찌는 듯 한 무더위 속에 지루하게 이어졌다.

즉위 초기에 나이 어린 임금을 길들여 놓겠다는 사람파의 파상공세는 집요했다.

삼사는 물론 승정원과 예문관 그리고 성균관 유생들까지 동원되었다.

이 무렵 연산에게는 자신을 떠받쳐줄 세력이 없었다. 그것을 사림(士林)이 노린 것이다.

 

                    

 

@IMG7@살곶이다리. 연산이 마음이 괴로울때면 아버지 성종을 찾아가기 위하여 건넜던 다리.

연산은 이 다리를 건너 뚝섬에서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 능참사찰 봉원사에서 휴식을 취하고 선릉을  참배했다. 세종때 착공하여 성종 14년(연산 7살 때)에 완공한 다리이다.

 

10월이 되자 사림의 공세는 더욱 거칠어졌다.

실록을 다시 들여다보자.

 

<노사신(盧思愼)·윤효손(尹孝孫)은 의논드리기를, “신하가 인군에게 세 번 가하여 듣지 않으면, 말하는 책임이 있는 자가 그 말이 인정되지 않는 것인즉, 떠나는 것입니다.

지금 대간이 아뢰어 청하기를, 세 번에만 그치지 않았으니, 사직하며 물러가기를 구하는 것은 진실로 당연한 것입니다”>

  이건 신하가 임금에게 해서는 아니 될 강요고 불경스런 협박이다.

 

지루한 공방이 3년간 지속되었다.

사림(士林)들이 공격하고 연산이 방어하는 입장이었다.

 

밀리기만 하던 연산은 막무가내 밀리는 것만은 아니었다. 반격의 칼을 갈고 있었다. 아버지 성종의 3년 탈상이 끝나자 칼을 빼어 들었다. 조의제문은 좋은 빌미였다.

   이렇게 시작된 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무오사화이고 연산 4년 7월에 벌어진 옥사(獄事)다.

 

여기서 잠간,

연산의 신하로서 선대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한 김일손이

세조의 왕위찬탈을 우회적으로 비판한 조의제문을 왜 실록에 삽입했느냐 하는 것이다.

물론 조의제문의 해석의 여지는 있다.

 

하지만 공초에서 연산이 제시한 논거를 김일손은 반증하거나 반박하지 못했다.

   암묵적으로 긍정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