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4. 15. 13:11ㆍ카테고리 없음
[북데일리] 고등학교 역사교과서는 남북국시대가 있었다고 나와있다. 남쪽에는 통일신라가 북에는 발해가 있었던 것을 일컫는 말이다. 발해는 고구려 멸망이후 고구려 부흥운동의 연장선에서 698년에 건국 했다.
그 후 넓은 영토를 가진 강력한 국가로 존재했다. 그렇게 강력했던 국가가 너무 쉽게 무너졌다. 역사 문헌에 있는 발해멸망의 모습은 뭔가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었다. 그런데 몇 년 전 발해멸망이 백두산의 화산폭발 때문이었다고 한 TV 다큐멘터리에서 소개된 적이 있었다. 정말 발해는 백두산 화산 폭발이 원인이 된 것일까?
진재운이 쓴 <백두산에 묻힌 발해를 찾아서>(산지니. 2008)는 발해의 멸망과 백두산 화산 폭발에 관해 쓴 책이다. 화산학과 같은 자연과학적인 지식을 동원하고 역사서를 해석하면서 이에 대한 답을 독자들에게 들려주고 있다.
많은 화산학자들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10세기에 백두산은 인류역사상 가장 강력한 수준의 화산폭발을 일으켰다고 한다. 그 폭발의 증거는 백두산 부근은 물론이고, 동해를 건너 일본 동북부 지방인 아오모리 현에서도 발견된다.
이 지방의 유적지의 딸을 30센티미터 가량 파헤치자 아래 위 흙과 다른 비교적 밝은 색을 띄고 있는 지질이 발견된다. 연구결과 화산재 층으로 확인된다. 그런데 이 화산재는 일본의 화산에서 나온 것과는 성분이 전혀 다르고, 그 지질에 대한 시대 측정을 해보니 지금으로부터 약 일천 년 전의 화산폭발 흔적이었다. 이를 연구한 일본학자는 이 폭발이 발해멸망의 원인이라는 가설을 발표했다.
백두산 화산폭발이 정말 지난 일만 년 이래 지구상에 가장 강력한 것이었다면 과연 어느 정도 규모였는지에 대해 학자들은 연구를 했다. 그 결과는 이전까지 가장 강력한 화산폭발로 알려졌던 1815년 인도네시아 숨바와 섬의 탐보라 화산 폭발의 3배 이상의 규모였다고 한다.
탐보라 화산 폭발은 섬에 살고 있던 주민 1만여 명이나 죽게 했으며, 화산재가 햇빛을 가리면서 열사의 섬에 추위가 찾아와 약 10만여 명이 굶어 죽거나 얼어 죽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피해에 이에 그치지 않았다. 분출된 화산재는 34킬로미터 이상의 성층권으로 치솟으면서 기류를 타고 미국과 유럽으로 확산되었다. 화산이 폭발한 다음해인 1816년 유럽 전역은 ‘여름이 없는 해’로 기록되었다. 미국에서도 매우 추운 여름이 출현했다고 기록돼 있다.
이 폭발 위력은 히로시마에 투하했던 원자폭탄 6만 개가 동시에 폭발한 것과 맞먹는다고 하니, 엄청난 충격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백두산 화산폭발은 탐보라 화산의 3배 이상이었다니 정말 놀랄만하다.
이상한 점은 이런 큰 사건이 왜 역사서에는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백두산 화산이 폭발한 것은 진실인 것은 확신한 것인데, 이는 어떤 이유 때문이었을까?
이에 저자는 “당시 주변 정세의 복잡성에서 그 답을 찾는 것이 오히려 설득력이 높을 것으로 보인다. 10세기 동아시아에 백두산 화산 폭발이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보다는 당시 이 지역이 정치적으로 어떠한 변동의 과정에 있었는지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10세기의 동아시아의 모습을 보면, 중국은 5대10국 혼란기에 있었으며, 동북아에서는 발해의 멸망과 요나라의 건국 등이 일어나는 등 상당히 혼란스러웠다. 또한 한반도에서도 후삼국의 혼란기를 거쳐 고려가 건국되었던 시기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런 이유 때문에 역사서에 기재되지 않았다는 것은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이다.
거란이 세운 나라의 역사서인 <요서>에는 발해멸망에 대해서 ‘이심(離心)’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이는 ‘민심이 등을 돌렸다“나 ’내부적 갈등이 있었다‘로 보기도 한다. 많은 학자들은 내분으로 인해 민심이반이 발해 멸망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말하고 있다. 즉 백두산의 화산폭발은 멸망의 원인이 아니었던 것이다. 연구결과 백두산 화산 폭발은 발해가 멸망한지 10년 정도 뒤로 추정하고 있다.
926년 발해가 멸망되고도 부흥운동은 지속적으로 일어난다. 먼저 후발해가 탄생했고, 그 후 정안국을 세워 발해 부흥운동은 계속된다. 즉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요나라)은 효과적으로 발해를 다스리지 못해다는 것이다. 부흥운동 중에도 발해는 각국에 사신을 보낸다.
그러나 936년 이후 사신의 기록은 18년 뒤인 954년에 가서야 다시 등장한다. 즉 후발해는 매년 후당에 사신과 조공을 바쳤는데 유독 936년 이후부터 18년간의 기록이 없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는 후당으로 가는 길이 백두산 화산 폭발로 인하여 막혔기 때문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이 책을 쓴 사람은 진재운이다. 그는 학자가 아니라 기자다. 부산경남의 민영방송인 KNN의 기자로 자신이 직접 발로 뛰면서 백두산 폭발과 발해멸망의 관계에 대해 새롭게 해석해내고 있다.
학자가 아닌 사람이 이런 전문적인 책을 쓴다는 것이 상당히 놀랍다. 저자는 자신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수많은 관련 학자들과 인터뷰하고 전문가들의 연구결과를 분석하고, 게다가 직접 자신의 발로 여러 곳을 취재함으로써 가능했을 것이다.
화산학을 비롯해 여러 자연과학분야의 연구 결과를 활용해서 역사학에서 해결해주지 못하고 있는 부분을 어느 정도는 채워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러한 내용에 대해 역사학계에서는 짐짓 모르는 척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제기만으로도 진리에 다가갈 수 있는 길이 열릴 수 있는 것 아닌가? 이제 나머지 일은 역사학자들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