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고도의 경주에는 유서 깊은 신라시대에도 없었던 전설 같은 최 부자댁의 미담(美談)이 세월은 흘러갔지만 각박한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크게 귀감이 될 수 있는 내용으로서 후대들을 위한 교과서라도 수록되고 남음이 있는 모본사료(模本史料)가 야사(野史)처럼 이 사람 저 사람의 입을 통해서 전해지고 있다.
'부자가 3대를 넘기기 힘들다'는 부불삼대(富不三代)의 속설이 무색할 정도로 300년 동안 이어지게 된 만석군(萬石君)의 기초를 다진 경주 최씨의 파시조(派始祖)이기도 한 정무공(貞武公) 최진립(崔震立) 장군은 인조(仁祖) 14년(1636)에 청나라에서 10만 대군을 몰고 쳐들어왔던 병자호란 때 69세의 노구(老軀)를 이끌고 최전선에서 적군과 싸우다가 순국하게 되므로 임금께서 국풍(國風)까지 보내서 물색하여 하사한 땅에 국장(國葬)으로 모신 곳이 울산시 울주군 언양읍 반연리에 위치한 지금의 음택(陰宅)이라고 한다.
정무공(貞武公) 최진립(1568∼1636)께서는 25세 때 임진왜란을 당하자 의병을 일으켜 왜군과 싸웠던 애국심이 강한 분으로 27세에 무과(武科)에 급제한 이후에 여러 관직을 수행했으나 한때 모함을 받아 울산으로 귀양가기도 했지만 인조반정으로 풀려나와 관직을 많이 맡았으나 관사에 첩을 두지 아니했고 생의 최후에는 나라를 위해 장렬하게 목숨을 바친 애국선열(愛國先烈)로서 충(忠)의 본보기 노정을 가신 분이기도 하다.
이러한 애국선열(愛國先烈)의 직계자손으로서 정무공의 셋째 아들인 최동량공은 아버지의 묘 옆에서 3년 동안 시묘(侍墓)살이를 하게 되었으니 효도(孝道)의 본보기 노정을 가신 분으로 아버지는 충(忠)의 본보기 노정을, 아들은 효도(孝道)의 본보기 노정을 가게 되었으니 9대 진사와 12대 만석군(萬石君)의 기초는 여기에서 다져지게 된 것이다.
충과 효의 본보기 노정을 기초로 하여 정무공의 손자 되는 최국선(崔國璿)공 시대에는 재산이 놀라울 정도로 늘어났다고 한다. 만석군 부자를 이룬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의 집터는 정무공 부친의 처가댁이었는데, 아들이 없었기에 재산과 집은 자연스럽게 부친이 물려받아 정무공에게 계승된 것이며 이 집터에서 만석군(萬石君)의 기초를 다진 이후 12대까지 이어진 계통(系統)을 알아본다면 다음과 같다.
①최진립(崔震立)→②동량(東亮)→③국선(國璿)→④의기(義基)→⑤승열(承烈)→⑥종률(宗?)→⑦언경(彦璥)→⑧기영(祈永)→⑨세린(世麟)→⑩만희(晩喜)→⑪현식(鉉軾)→⑫준(浚)
이렇게 만석군 12대 중에서 3대인 국선(國璿)공 시대에 재산이 크게 늘어나게 되면서 방문하는 손님들이 점점 많아짐에 따라 좁은 집에서 감당하기가 어려워지는 등 불편을 느끼게 됨으로써 결국 7대의 언경(彦璥)공 시대에 지금의 경주 교동 69번지로 이사하게 된다.
부언한다면 7대인 최언경(崔彦璥)공이 이사하게 되었으므로 12대 만석군 중에 6대까지는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에서 살았고 언경(彦璥)공부터 준(浚)공까지는 요석궁터였던 경주 교동 69번지에서 살게 되었으니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의 양택(陽宅)은 만석군 부자를 이룬 집터라면 경주시 교동 69번지의 양택(陽宅)은 만석군 부자를 지킨 집터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까지 경주 최 부자댁을 방문했던 지사(地師)들이 경주 교동 69번지의 양택(陽宅)에 대해서는 밝혀놓은 내용들이 많지만 만석군의 부자를 이룬 이조리의 양택과 이를 뒷받침 해주고 있는 울산시 울주군 언양읍 반연리에 위치한 정무공 최진립 장군의 음택(陰宅)과 아들인 최동량(崔東亮)공의 음택에 대해서는 밝혀지지 못한 내용들이 많기 때문에 본책자에서는 주로 이 부분에 대하여 중점적으로 밝히기로 한다.
저희가 인터넷에 나와 있는 경주 최 부자댁에 대한 자료를 보고 2008년 2월 중순경에 처음으로 방문해보고 감탄한 바 있었는데, 지상학(풍수지리)을 공부하시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9대 진사와 12대 만석군의 부를 이어온 경주 최 부자댁의 양택(陽宅)과 음택(陰宅)을 지상학적인 차원에서 알아보기로 한다.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에 위치한 만석군의 양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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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의 선조(宣祖) 때부터 왜군을 막는 데 공헌하기 시작했던 최진립 장군이 국가를 위해 장렬하게 목숨까지 바친 충(忠)의 본보기 노정과 위대한 선열(先烈)의 직계아들로서 동량(東亮)공이 삼년 동안 시묘(侍墓)살이를 함으로써 효도(孝道)의 본보기 노정을 가게 되었던 충효(忠孝)를 기초로 하여 손자인 국선(國璿)공부터 큰 부자가 되기 시작해 만석부자(萬石富者)가 된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의 양택(陽宅) 명당(明堂)을 지상학적으로 표현한다면 동서남북 사방에 노적이 쌓여 있는 사방노적형(四方露積形)이다.
경북 경주시 내남면에 위치한 이조(伊助)리는 미역내?별내?박달천의 3갈래 물줄기가 모아져 합수(合水)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갯모음'이라고도 했다는데, 이조리의 만석군(萬石君) 양택(陽宅)을 중심삼고 노적봉처럼 생긴 크고 작은 산들이 사방팔방으로 감싸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중에서도 사방(四方)에 노적봉(露積峯) 형상으로 창조된 산들이 정위치에 놓여 있으니 만석군의 천비(天秘)는 사방노적형(四方露積形)의 지상(地相)에서부터 풀어야 한다.
그렇지만 모든 천지이치는 음과 양이 조화를 이루어야 하므로 만석군을 낸 양택(陽宅)이 사방노적형(四方露積形)이라면 이와 조화를 이루는 음택(陰宅)도 갖추고 있어야 하는데 울산시 울주군 언양읍 반연리 산속에 정무공(貞武公)과 동량(東亮)공을 모셔놓은 음택(陰宅)이 달밤에 피리를 부는 월야취적형(月夜吹笛形)의 명당(明堂)으로서 이조리의 양택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정무공과 동량공의 음택 월야취적형의 地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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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시 울주군 언양읍 반연리 산속에 모셔놓은 정무공(貞武公) 음택과 효도(孝道)의 본보기 노정을 가게 된 동량(東亮)공 음택을 지상학(풍수지리)으로 본다면 달밤에 피리를 부는 월야취적형(月夜吹笛形)으로서 천하대지(天下大地)라고 할 수 있는 명당(明堂)인데, 地相을 파악하지 못한 입장에서는 아들을 아버지 위에 모셨으니 역장(逆葬)이 되지 아니할까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피리를 부는 취적형(吹笛形)은 다섯 개의 음공(音孔) 중에서 가장 밑에 있는 음공부터 산소를 써올라 가기 때문에 합당한 것이다.
그리고 월야취적형(月夜吹笛形)이란 인간이 달밤에 피리를 부는 형으로서 인간의 머리에서부터 다섯 개의 구멍 즉 오음공(五音孔)을 막아주기 위한 양팔과 피리까지 함께 어우러져야 하는데, 정무공과 동량공을 모신 길다란 음택(陰宅)자리는 피리에 해당되고 음택(산소)을 가깝게 감싸고 있는 좌청룡과 우백호는 왼팔과 오른팔에 해당되며 산소의 주산(主山)은 인간의 머리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경주 최씨의 파시조(派始祖)로서 충(忠)의 본보기 노정을 가게 되었던 정무공(貞武公)을 모셔놓은 음택(陰宅)은 월야취적형(月夜吹笛形)의 가장 아래 음공(音孔)에 모시면서 산소의 좌향을 신좌을향(辛坐乙向)으로 하여 멀리 바라다 보이는 곳에 3개의 산줄기가 모아지면서 둥근알처럼 보이는 산봉우리를 이루어 놓았는데 이를 지상학적으로는 성란봉(聖卵峰)이라고 하며 이러한 성란봉(聖卵峰)의 지상운세(地相運勢)에 힘입어 성인(聖人)으로 탄생하신 분이 최수운 대신사님이다.
이에 대하여 부언한다면, 정무공의 형제분은 4형제였는데 장형이 대를 이을 아들이 없어 정무공의 4남이 백부 앞으로 양자를 가게 되었고 그 혈통에서 정무공의 7대 후손으로 천도교(天道敎)의 교조(敎祖)이신 최수운 대신사님께서 성인(聖人)으로 탄생하였으니 월야취적형(月夜吹笛形)의 地相결실이기도 하다.
다음으로 월야취적형(月夜吹笛形)의 상위 음공(音孔)에는 효도(孝道)의 본보기 노정을 가신 동량(東亮)공을 모시면서 산소의 좌향을 유좌묘향(酉坐卯向)으로 하여 가깝게 정면으로 보이는 안산(案山)을 피리부는 악보(樂譜)로 하였고 안산(案山) 너머 가까이 있는 풍만한 산봉우리는 노적봉(露積峯)이 될 수도 있고 밤이면 달이 될 수도 있는 것이며, 달밤의 피리소리는 듣기도 좋을 뿐 아니라 멀리까지 들리기 때문에 경주 최 부자댁의 미담(美談)은 전국적으로 멀리멀리 퍼져갔던 것이다.
또한 피리를 부는 취적형(吹笛形)의 5음공(五音孔) 중에서 세 음공(音孔)은 원래부터 고총이 있었다고 하는데 예의범절을 중시하는 최씨 가문에서 파묘하지 않고 보존시켜 줌에 따라 서로 어우러져서 월야취적형(月夜吹笛形)의 오공(五孔)을 다 활용하는 즉 완벽하게 갖춘 명당(明堂)으로서 9대 진사와 12대 만석군(萬石君)의 부자로 300년 동안 지켜올 수 있는 밑바탕이 되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볼 때, 사방노적형(四方露積形)의 양택(陽宅)운수와 월야취적형(月夜吹笛形)의 음택(陰宅)운수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최 부자가문의 유훈으로서, 첫째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을 하지 말라. 둘째 재산은 만석 이상 모으지 말라. 셋째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넷째 흉년에는 재산을 늘리지 말라. 다섯째 최씨 가문의 며느리들은 시집온 지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을 것. 여섯째 사방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할 것. 일곱째 물건을 아껴쓰고 이웃에 나누어주라는 유훈(遺訓)과 직계조(直系祖)인 동량(東亮)공의 훈계로서 가정에는 효도하고 나라에는 충성하며 형제간에는 우애하고 친구간에는 신의를 지키며 술에 취함을 경계하고 여색(女色)을 멀리 하라는 등의 가훈을 지켰기 때문에 경주 최 부자가 300년 동안 이어지게 된 것이다.
더욱 귀감이 될 수 있는 일로는 9대 진사와 12대 만석군으로 300년 동안 이어진 재물이 12대의 최준(崔浚)공 시대에 1차적으로는 잃어버린 나라를 찾기 위한 독립운동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는 데 쓰여졌고, 2차적으로는 교육사업에 투자하여 대학을 세우게 되었으나 5?16군사혁명 후 운영이 어려워지던 차에 당시 교육에 뜻이 있었던 호암 이병철씨에게 대가 없이 넘겨주게 되었는데, 한비사건(사카린밀수사건)으로 호암이 세찬 여론 때문에 곤경에 처하여 모든 활동에서 손을 떼고 물러나게 되므로 박정희 대통령에게 다시 넘어가게 된 학교재단이 오늘의 영남대학이라고 한다.
부언한다면, 서양의 최장수 부자가문으로 유명한 이탈리아의 '메디치'가문은 200년 동안 유지되면서 좋은 일도 많이 했으나 정권의 실세로 권력을 행사하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를 축적하는 등 반윤리적인 행태를 보이다가 결국 멸문되고 말았지만, 경주 최 부자댁은 300년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나라를 찾는 광복자금(光復資金)으로 투자했고 어두운 시대에 후대를 위한 교육자금(敎育資金)으로 투자하여 국가도 학교도 잘 운영되고 있기 때문에 지금도 국가와 영남대학의 이름으로 유지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300년 동안 이어진 최 부자댁의 재물은 헛되이 쓰여지지 않고 암울했던 일제 말에 빛도 이름도 없이 수고한 숨은 애국자요 해방 이후 어두웠던 시대에 숨은 교육자이기도 한 최준(崔浚)공을 통해서 값있게 쓰여졌기 때문에 각박한 현실에 편승해서 편리할 대로 살아가려는 후대들에게 생활철학의 교육자료로서 귀감이 되고도 남음이 있는 모본사료(模本史料)가 야사처럼 구전을 통해서 전해지고 있으니 아쉬운 마음 금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