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택 음택 경주 최부자 이병철회장

2009. 6. 19. 22:48가인풍수지리·음택과양택

경주 최 부자댁과 호암 이병철 회장 및 인촌 김성수 선생의 양택?음택 地相

 
1. 9대 진사와 12대 만석군을 지낸 경주 최 부자댁의 귀감

    천년고도의 경주에는 유서 깊은 신라시대에도 없었던 전설 같은 최 부자댁의 미담(美談)이 세월은 흘러갔지만 각박한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크게 귀감이 될 수 있는 내용으로서 후대들을 위한 교과서라도 수록되고 남음이 있는 모본사료(模本史料)가 야사(野史)처럼 이 사람 저 사람의 입을 통해서 전해지고 있다.


    '부자가 3대를 넘기기 힘들다'는 부불삼대(富不三代)의 속설이 무색할 정도로 300년 동안 이어지게 된 만석군(萬石君)의 기초를 다진 경주 최씨의 파시조(派始祖)이기도 한 정무공(貞武公) 최진립(崔震立) 장군은 인조(仁祖) 14년(1636)에 청나라에서 10만 대군을 몰고 쳐들어왔던 병자호란 때 69세의 노구(老軀)를 이끌고 최전선에서 적군과 싸우다가 순국하게 되므로 임금께서 국풍(國風)까지 보내서 물색하여 하사한 땅에 국장(國葬)으로 모신 곳이 울산시 울주군 언양읍 반연리에 위치한 지금의 음택(陰宅)이라고 한다.


    정무공(貞武公) 최진립(1568∼1636)께서는 25세 때 임진왜란을 당하자 의병을 일으켜 왜군과 싸웠던 애국심이 강한 분으로 27세에 무과(武科)에 급제한 이후에 여러 관직을 수행했으나 한때 모함을 받아 울산으로 귀양가기도 했지만 인조반정으로 풀려나와 관직을 많이 맡았으나 관사에 첩을 두지 아니했고 생의 최후에는 나라를 위해 장렬하게 목숨을 바친 애국선열(愛國先烈)로서 충(忠)의 본보기 노정을 가신 분이기도 하다.


    이러한 애국선열(愛國先烈)의 직계자손으로서 정무공의 셋째 아들인 최동량공은 아버지의 묘 옆에서 3년 동안 시묘(侍墓)살이를 하게 되었으니 효도(孝道)의 본보기 노정을 가신 분으로 아버지는 충(忠)의 본보기 노정을, 아들은 효도(孝道)의 본보기 노정을 가게 되었으니 9대 진사와 12대 만석군(萬石君)의 기초는 여기에서 다져지게 된 것이다.


    충과 효의 본보기 노정을 기초로 하여 정무공의 손자 되는 최국선(崔國璿)공 시대에는 재산이 놀라울 정도로 늘어났다고 한다. 만석군 부자를 이룬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의 집터는 정무공 부친의 처가댁이었는데, 아들이 없었기에 재산과 집은 자연스럽게 부친이 물려받아 정무공에게 계승된 것이며 이 집터에서 만석군(萬石君)의 기초를 다진 이후 12대까지 이어진 계통(系統)을 알아본다면 다음과 같다.


 
    ①최진립(崔震立)→②동량(東亮)→③국선(國璿)→④의기(義基)→⑤승열(承烈)→⑥종률(宗?)→⑦언경(彦璥)→⑧기영(祈永)→⑨세린(世麟)→⑩만희(晩喜)→⑪현식(鉉軾)→⑫준(浚)
 
    이렇게 만석군 12대 중에서 3대인 국선(國璿)공 시대에 재산이 크게 늘어나게 되면서 방문하는 손님들이 점점 많아짐에 따라 좁은 집에서 감당하기가 어려워지는 등 불편을 느끼게 됨으로써 결국 7대의 언경(彦璥)공 시대에 지금의 경주 교동 69번지로 이사하게 된다.


    부언한다면 7대인 최언경(崔彦璥)공이 이사하게 되었으므로 12대 만석군 중에 6대까지는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에서 살았고 언경(彦璥)공부터 준(浚)공까지는 요석궁터였던 경주 교동 69번지에서 살게 되었으니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의 양택(陽宅)은 만석군 부자를 이룬 집터라면 경주시 교동 69번지의 양택(陽宅)은 만석군 부자를 지킨 집터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까지 경주 최 부자댁을 방문했던 지사(地師)들이 경주 교동 69번지의 양택(陽宅)에 대해서는 밝혀놓은 내용들이 많지만 만석군의 부자를 이룬 이조리의 양택과 이를 뒷받침 해주고 있는 울산시 울주군 언양읍 반연리에 위치한 정무공 최진립 장군의 음택(陰宅)과 아들인 최동량(崔東亮)공의 음택에 대해서는 밝혀지지 못한 내용들이 많기 때문에 본책자에서는 주로 이 부분에 대하여 중점적으로 밝히기로 한다.


    저희가 인터넷에 나와 있는 경주 최 부자댁에 대한 자료를 보고 2008년 2월 중순경에 처음으로 방문해보고 감탄한 바 있었는데, 지상학(풍수지리)을 공부하시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9대 진사와 12대 만석군의 부를 이어온 경주 최 부자댁의 양택(陽宅)과 음택(陰宅)을 지상학적인 차원에서 알아보기로 한다.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에 위치한 만석군의 양택
 
   조선왕조의 선조(宣祖) 때부터 왜군을 막는 데 공헌하기 시작했던 최진립 장군이 국가를 위해 장렬하게 목숨까지 바친 충(忠)의 본보기 노정과 위대한 선열(先烈)의 직계아들로서 동량(東亮)공이 삼년 동안 시묘(侍墓)살이를 함으로써 효도(孝道)의 본보기 노정을 가게 되었던 충효(忠孝)를 기초로 하여 손자인 국선(國璿)공부터 큰 부자가 되기 시작해 만석부자(萬石富者)가 된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의 양택(陽宅) 명당(明堂)을 지상학적으로 표현한다면 동서남북 사방에 노적이 쌓여 있는 사방노적형(四方露積形)이다.


    경북 경주시 내남면에 위치한 이조(伊助)리는 미역내?별내?박달천의 3갈래 물줄기가 모아져 합수(合水)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갯모음'이라고도 했다는데, 이조리의 만석군(萬石君) 양택(陽宅)을 중심삼고 노적봉처럼 생긴 크고 작은 산들이 사방팔방으로 감싸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중에서도 사방(四方)에 노적봉(露積峯) 형상으로 창조된 산들이 정위치에 놓여 있으니 만석군의 천비(天秘)는 사방노적형(四方露積形)의 지상(地相)에서부터 풀어야 한다.


    그렇지만 모든 천지이치는 음과 양이 조화를 이루어야 하므로 만석군을 낸 양택(陽宅)이 사방노적형(四方露積形)이라면 이와 조화를 이루는 음택(陰宅)도 갖추고 있어야 하는데 울산시 울주군 언양읍 반연리 산속에 정무공(貞武公)과 동량(東亮)공을 모셔놓은 음택(陰宅)이 달밤에 피리를 부는 월야취적형(月夜吹笛形)의 명당(明堂)으로서 이조리의 양택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정무공과 동량공의 음택 월야취적형의 地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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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산시 울주군 언양읍 반연리 산속에 모셔놓은 정무공(貞武公) 음택과 효도(孝道)의 본보기 노정을 가게 된 동량(東亮)공 음택을 지상학(풍수지리)으로 본다면 달밤에 피리를 부는 월야취적형(月夜吹笛形)으로서 천하대지(天下大地)라고 할 수 있는 명당(明堂)인데, 地相을 파악하지 못한 입장에서는 아들을 아버지 위에 모셨으니 역장(逆葬)이 되지 아니할까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피리를 부는 취적형(吹笛形)은 다섯 개의 음공(音孔) 중에서 가장 밑에 있는 음공부터 산소를 써올라 가기 때문에 합당한 것이다.


    그리고 월야취적형(月夜吹笛形)이란 인간이 달밤에 피리를 부는 형으로서 인간의 머리에서부터 다섯 개의 구멍 즉 오음공(五音孔)을 막아주기 위한 양팔과 피리까지 함께 어우러져야 하는데, 정무공과 동량공을 모신 길다란 음택(陰宅)자리는 피리에 해당되고 음택(산소)을 가깝게 감싸고 있는 좌청룡과 우백호는 왼팔과 오른팔에 해당되며 산소의 주산(主山)은 인간의 머리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경주 최씨의 파시조(派始祖)로서 충(忠)의 본보기 노정을 가게 되었던 정무공(貞武公)을 모셔놓은 음택(陰宅)은 월야취적형(月夜吹笛形)의 가장 아래 음공(音孔)에 모시면서 산소의 좌향을 신좌을향(辛坐乙向)으로 하여 멀리 바라다 보이는 곳에 3개의 산줄기가 모아지면서 둥근알처럼 보이는 산봉우리를 이루어 놓았는데 이를 지상학적으로는 성란봉(聖卵峰)이라고 하며 이러한 성란봉(聖卵峰)의 지상운세(地相運勢)에 힘입어 성인(聖人)으로 탄생하신 분이 최수운 대신사님이다.


    이에 대하여 부언한다면, 정무공의 형제분은 4형제였는데 장형이 대를 이을 아들이 없어 정무공의 4남이 백부 앞으로 양자를 가게 되었고 그 혈통에서 정무공의 7대 후손으로 천도교(天道敎)의 교조(敎祖)이신 최수운 대신사님께서 성인(聖人)으로 탄생하였으니 월야취적형(月夜吹笛形)의 地相결실이기도 하다.


    다음으로 월야취적형(月夜吹笛形)의 상위 음공(音孔)에는 효도(孝道)의 본보기 노정을 가신 동량(東亮)공을 모시면서 산소의 좌향을 유좌묘향(酉坐卯向)으로 하여 가깝게 정면으로 보이는 안산(案山)을 피리부는 악보(樂譜)로 하였고 안산(案山) 너머 가까이 있는 풍만한 산봉우리는 노적봉(露積峯)이 될 수도 있고 밤이면 달이 될 수도 있는 것이며, 달밤의 피리소리는 듣기도 좋을 뿐 아니라 멀리까지 들리기 때문에 경주 최 부자댁의 미담(美談)은 전국적으로 멀리멀리 퍼져갔던 것이다.


    또한 피리를 부는 취적형(吹笛形)의 5음공(五音孔) 중에서 세 음공(音孔)은 원래부터 고총이 있었다고 하는데 예의범절을 중시하는 최씨 가문에서 파묘하지 않고 보존시켜 줌에 따라 서로 어우러져서 월야취적형(月夜吹笛形)의 오공(五孔)을 다 활용하는 즉 완벽하게 갖춘 명당(明堂)으로서 9대 진사와 12대 만석군(萬石君)의 부자로 300년 동안 지켜올 수 있는 밑바탕이 되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볼 때, 사방노적형(四方露積形)의 양택(陽宅)운수와 월야취적형(月夜吹笛形)의 음택(陰宅)운수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최 부자가문의 유훈으로서, 첫째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을 하지 말라. 둘째 재산은 만석 이상 모으지 말라. 셋째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넷째 흉년에는 재산을 늘리지 말라. 다섯째 최씨 가문의 며느리들은 시집온 지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을 것. 여섯째 사방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할 것. 일곱째 물건을 아껴쓰고 이웃에 나누어주라는 유훈(遺訓)과 직계조(直系祖)인 동량(東亮)공의 훈계로서 가정에는 효도하고 나라에는 충성하며 형제간에는 우애하고 친구간에는 신의를 지키며 술에 취함을 경계하고 여색(女色)을 멀리 하라는 등의 가훈을 지켰기 때문에 경주 최 부자가 300년 동안 이어지게 된 것이다.


    더욱 귀감이 될 수 있는 일로는 9대 진사와 12대 만석군으로 300년 동안 이어진 재물이 12대의 최준(崔浚)공 시대에 1차적으로는 잃어버린 나라를 찾기 위한 독립운동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는 데 쓰여졌고, 2차적으로는 교육사업에 투자하여 대학을 세우게 되었으나 5?16군사혁명 후 운영이 어려워지던 차에 당시 교육에 뜻이 있었던 호암 이병철씨에게 대가 없이 넘겨주게 되었는데, 한비사건(사카린밀수사건)으로 호암이 세찬 여론 때문에 곤경에 처하여 모든 활동에서 손을 떼고 물러나게 되므로 박정희 대통령에게 다시 넘어가게 된 학교재단이 오늘의 영남대학이라고 한다.


    부언한다면, 서양의 최장수 부자가문으로 유명한 이탈리아의 '메디치'가문은 200년 동안 유지되면서 좋은 일도 많이 했으나 정권의 실세로 권력을 행사하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를 축적하는 등 반윤리적인 행태를 보이다가 결국 멸문되고 말았지만, 경주 최 부자댁은 300년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나라를 찾는 광복자금(光復資金)으로 투자했고 어두운 시대에 후대를 위한 교육자금(敎育資金)으로 투자하여 국가도 학교도 잘 운영되고 있기 때문에 지금도 국가와 영남대학의 이름으로 유지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300년 동안 이어진 최 부자댁의 재물은 헛되이 쓰여지지 않고 암울했던 일제 말에 빛도 이름도 없이 수고한 숨은 애국자요 해방 이후 어두웠던 시대에 숨은 교육자이기도 한 최준(崔浚)공을 통해서 값있게 쓰여졌기 때문에 각박한 현실에 편승해서 편리할 대로 살아가려는 후대들에게 생활철학의 교육자료로서 귀감이 되고도 남음이 있는 모본사료(模本史料)가 야사처럼 구전을 통해서 전해지고 있으니 아쉬운 마음 금할 수 없다.

2. 호암 이병철 회장의 양택과 증조부님 음택의 地相 해설

   20세기를 주도했던 황금만능의 물질문명의 시대를 살아오면서 인간들이 황금의 노예가 될 정도로 황금의 위력은 대단했기 때문에 세상사가 어느 것 하나도 황금을 기조로 하지 않고는 되는 일이 없기에 인생의 목적도 황금을 추구하기 위한 방향전환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오늘까지의 세상이기도 하다. 이러한 황금만능의 물질문명시대를 살아오면서 한국에서 손꼽히는 갑부로서 황금을 많이 소유한 호암 이병철 회장님은 뭇 사람들로부터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로서 많은 사람들이 경남 의령에 있는 호암생가(湖巖生家)를 방문하다 보니 마을 앞에는 운동장 같은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는 실정이다.


    저희도 세인들이 궁금하게 생각하는 문제들을 근본적으로 풀어보기 위해서 2008년 2월초에 처음으로 경남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에 있는 호암생가를 방문했고 2월 중순경에는 경남 의령군 유곡면 마두리에 있는 호암 증조부님(이재봉) 음택(陰宅)까지 현지답사를 해보고 나서야 한국의 국부(國富)가 인간의 노력이나 능력만으로 된 것이 아니라 천지운세(天地運勢)를 타고나야 한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았기 때문에 지금부터는 호암의 전생(前生)과 양택(陽宅) 및 음택(陰宅)에 대하여 순차적으로 알아보기로 한다.


    우리 인간이 타고나는 천지운세(天地運勢)를 크게 분류한다면 전생(前生)과 결부되는 천운(天運)과 나고 자란 양택(陽宅)과 조상들의 유골을 모신 음택(陰宅)과 결부되는 지운(地運)까지의 삼대운수(三大運數)를 가리킨 것이다.


    예컨대 한민족의 거부(巨富)로 손꼽히는 정주영 회장님의 전생(前生)도 본책자에 밝혀놓았듯이 구약시대에 적수공권으로 타국에서 거부가 되어 양떼를 몰고 금의환향했던 야곱이기 때문에 북한에서 고향을 떠나 남한으로 내려와 거부가 된 다음 일천 마리의 소떼를 몰고 금의환향하였듯이, 호암의 전생(前生)은 농사를 해서 거부가 된 경주 최 부자댁의 최국선(崔國璿)공으로서, 호암은 사업을 하여 거부가 된 점이 다를 뿐인데 1차적으로 전생(前生)과 결부되는 천운(天運)을 타고났기 때문에 국부(國富)가 된 것이다.


    다음으로 양택(陽宅)과 결부되는 지운(地運)으로서 호암께서 나고 자란 경남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 마을 전체의 地相은 사금(砂金)을 채취할 때 활용하는 삼태기 형국 즉 사금분채형(砂金?採形)이요 호암생가의 지상은 사금을 캐내는 삼태기의 손잡이에 해당되므로 중교리 마을의 전체적인 지상도(地相圖)를 참조하여 가면서 알아보기로 한다.
 

사금분채형(砂金?採形)의 중교리 마을 地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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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금(砂金)이란 누구나 아는 상식으로서 금 성분을 가진 광석이 풍화나 침식작용으로 붕괴되어 그 속에 있는 자연금이 자갈과 함께 강변이나 해변 또는 그 바닥에 침적되어 있는 금으로, 보통 작은 알맹이나 비늘모양으로 되어 있는 것을 삼태기(?)로 채취하게 되는데 중교리 마을 전체적인 地相은 사금을 채취하는 삼태기 즉 사금분채형(砂金?採形)이요 호암생가의 地相은 사금(砂金)을 채취할 때 삼태기를 잡게 되는 부위로서 문자적으로 표현한다면 키 기(箕) 자와 삼태기 분(?) 자와 잡을 집(執) 자와 자루 병(柄) 자를 써서 기분집병형(箕?執柄形)이라고 한다.


    이에 대하여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본다면, 호암생가가 있는 중교리 마을의 전체적인 地相은 사금(砂金)을 채취하는 데 활용하는 삼태기 형국으로서 마을 앞 남쪽 좌편에 노적봉처럼 보이는 나지막한 산봉우리는 사금을 채취하기 전 자갈과 모래와 불순물과 금알갱이까지 한 데 긁어 모아놓은 무더기에 해당되고 마을에서 북쪽으로 산의 양능선 중앙에 둥글게 보이는 산봉우리는 삼태기로 불순물을 걸러내고 자갈과 금알갱이만 삼태기 안쪽에 모아진 무더기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금(砂金)을 채취하는 삼태기 형국으로 창조된 중교리 마을 중에서 호암생가의 터가 명당(明堂)이 되는 것은 사금(砂金)을 채취하려면 삼태기를 잡아야 하는데, 호암생가와 접해 있는 산능선이 바로 삼태기를 손으로 잡고 있는 위치 즉 기분집병형(箕?執柄形)이기 때문으로서 호암(湖巖)께서 이러한 양택(陽宅)의 운세에 힘입어 사금(砂金)을 캐내서 하나하나 모으듯이 여러 가지의 사업을 통해 돈을 모아서 한국 제일의 국부(國富)가 된 것이다.


    이렇게 사금분채형(砂金?採形)의 지상운세(地相運勢)를 타고 일찍부터 사업을 시작하여 사금(砂金)을 캐내듯이 하나하나 모아진 황금(돈)을 쌓아둘 금고(金庫)가 있어야 하는데, 호암(이병철)의 증조부님을 모셔놓은 음택(陰宅)이 지상학적으로 본다면 황금축고형(黃金蓄庫形)으로서, 사금(砂金)을 캐다가 쌓아놓을 수 있는 창고가 지상학적으로 창조되어 있으니 경탄할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경남 의령군 유곡면 마두리의 마두산 깊숙한 산속의 황금축고형(黃金蓄庫形) 명당에 호암의 증조부님을 모시기까지는 하늘도 감복할 수밖에 없는 호암 조부님의 정성어린 사연이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전해지고 있다.


    호암(湖巖)의 조부님께서는 당시에 내놓으라 하는 지관(地官)으로서 아버지의 유골을 궤짝에다 짊어지고 좋은 산소자리를 찾기 위해 10년을 돌아다녔지만 끝내 명당을 찾지 못하고 포기할 수밖에 없었는데 우연히 동네 뒤의 절에 놀러가서 스님에게 구산(求山)을 하기 위해 10년 동안 돌아다닌 이야기를 했더니 그 정성에 감복한 스님께서 잡아준 산자리가 지금의 황금축고형(黃金蓄庫形) 명당으로서 10년 동안 산을 보러 다녔지만 결국 자기 집 뒤에 묘를 쓰게 되었다는 문장이 '십년구산(十年求山)에 가후장(家後葬)'이다.


    경남 의령에는 예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금두꺼비가 엎드려 있는 금섬복지(金蟾伏地)에 묘를 쓰면 국부(國富)가 나온다는 말이 있었기에 10년 동안 금섬복지를 찾아다녔던 호암 조부님께서는 그 자리를 금섬복지로 보았기 때문에 호암이 어릴 적에 손을 붙잡고 호암 증조부님 산소를 데리고 다니면서 '너(이병철)는 앞으로 조선의 제일 가는 갑부(甲富)가 될 것'이라고 일러주었다고 한다.
 

뒤에서 본 이병철 회장님의 증조부님 산소인데 전망에 삼태안까지 잘 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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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축고형(黃金蓄庫形)의 명당에 모신 이병철 회장의 증조부님 산소
 
이병철 회장 증조부(이재봉) 묘소 바로 밑에 석축처럼 떠받치고 있는 바위로 형성된 금고(金庫)인데 이 바위가 바로 전설적으로 내려오는 금섬복지(金蟾伏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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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남 의령군 유곡면 마두리 깊은 산속에는 이병철 회장님의 증조부님 음택(陰宅)이 있는데 산골짜기 길로 들어서기 전에 마두리 마을회관 앞에서 멀지 않게 바라다 보이는 산의 모습은 당나귀의 등에다가 짐을 가득 싣고 있는 듯하게 보이는데 마을 사람들에게 알아본즉 이 산이 바로 마두산(馬頭山)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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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상학적으로 보아 말처럼 보이는 마두산(馬頭山)이 바로 금고(金庫)에 황금(돈)을 실어나르는 당나귀로서 황금축고형(黃金蓄庫形)의 地相을 총괄하는 가브리엘 천사의 존재양상(存在樣相)을 드러낸 실체형상이기도 하다. 저희가 처음으로 묘소를 찾아올 때 환상체로 현현하여 길을 인도해주기도 했는데 당나귀 등에다 황금(돈)을 가득 실어다 금고(金庫)에 쌓아놓게 되는 마두산(馬頭山)의 地相까지 갖추고 있는 등 국부(國富)가 나올 수 있는 지상학적 여건이 이곳저곳에 마련되어 있었다.


    이병철 회장님의 증조부님 음택(陰宅)에 대하여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본다면 산으로 둘러싸인 창고이기 때문에 산골짜기 좁은 길을 따라서 한참을 들어가다 보면 바윗돌로 형성된 황금축고형(黃金蓄庫形)의 바로 위에 호암의 증조부님 산소가 있으니 이는 금고(金庫) 위에 주인이 앉아 있는 격이며, 안산(案山)은 삼태안산(三台案山)으로서 풍만한 산봉우리 세 개가 너무도 잘 감싸주고 있을 뿐 아니라 황금축고형의 열쇠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부언한다면 황금축고형(黃金蓄庫形) 금고(金庫)의 열쇠이기도 한 삼태안산(三台案山)의 별 태(台) 자를 근거하여 삼성(三星)이라는 이름이 나오지 아니했을까로 추측하여 보기도 하는데, 지상학적으로 볼 때 양택(陽宅)은 사금분채형(砂金 採形)으로 사금(砂金)을 캐는 형국이요 음택(陰宅)은 황금축고형(黃金蓄庫形)으로서 사금(砂金)을 캐다가 쌓아놓을 수 있는 금고(金庫)까지 마련되어 있으니 국부(國富)가 나올 수밖에 없는 일로서 깊고 오묘한 하나님의 창조신비(創造神秘)에 경탄하고 감복할 따름이다.


    결론적으로 우리 인간의 운명을 크게 좌우하는 천지운세(天地運勢)로 볼 때 천운(天運)을 타고나는 전생(前生)과 결부되는 경주 최 부자댁의 대부(大富)는 시대적 배경으로 보아 곡식을 쌓아놓게 되는 노적봉이 필요했기 때문에 양택(陽宅)의 地相도 사방노적형(四方露積形)이었다면, 의령 호암 국부(國富)는 시대적 배경으로 보아 황금(돈)이 필요했기 때문에 양택(陽宅)의 地相도 황금을 채취할 수 있는 황금분채형(黃金 採形)이 필요했던 것이며, 경주 최 부자댁과 의령 호암가정의 전생(前生)관계를 입증시켜주는 내용이 경주 최 부자댁 종주(終主)인 최준(崔浚)공이 대대로 물려온 재산이 투자된 육영재단(育英財團)을 아무런 대가 없이 호암 이병철 회장님에게 계승시켰다는 것이다.


    차제에 필히 언급하고 가야 할 내용이 있다면, 소생이 천지이치를 깨달은 이후로 후대들에게 제일원인자요 창조주로서 무형으로 존재하는 神(하나님)의 창조목적과 신비(神秘)가 바로 땅 즉 지상(地相)에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전국을 다니면서 우리의 조상들이 존귀하게 생각하고 보존시켜 온 내용들이 너무도 귀하다는 것을 실감할 때마다 우리의 것이 귀중하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껴본 바 있다.


    선지자(先知者)의 한 사람으로서 분명하게 밝히노니 앞으로 어차피 세상은 한반도에서 한민족을 중심삼고 발동되는 초과학을 기조로 한 정신문명이 세계인류를 구제하게 되어 있는데, 섭리의 때를 알지 못하고 글로벌시대(세계화시대)라고 하여 세계로 다니면서 강대국들의 비위를 맞추다 보니 미국산 쇠고기 협상문제로 온 국민이 홍역을 앓고 있으니 답답하고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3. 세인의 관심사 정암바위에 대한 지상학적 해설

   경남 의령군에는 남강이 신비를 간직한 채 말없이 흐르고 있는데 남강 중간에는 솥단지 처럼 생긴 바위가 있다. 이 바위를 솥바위 즉 정암(鼎巖)바위라고 하는데 조선 후기에 어느 도인이 이 솥바위에 앉아 놀면서 '정암바위를 중심으로 반경 20리(8km) 이내에 나라를 크게 울리는 국부(國富)가 나게 될 것'이라고 예언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정암바위를 중심으로 20리 이내에 북쪽으로는 삼성(三星)이, 서남쪽으로는 금성(金星:LG)이, 동남쪽으로는 효성(曉星)이 국부(國富)로 등장하여 국가적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기 때문에 세인들의 관심사가 될 수밖에 없는데, 이를 예언했던 도인도 필시 세 방향에 위치한 산들이 가마솥 같고 별 같기도 한 地相을 근거로 해서 예언했을 것으로 사료되기 때문에 정암(鼎巖)과 결부되는 3대부성산(三大釜星山) 즉 가마솥 같기도 하고 별 같기도 한 부성산(釜星山)의 모습을 각기 그림으로 나타내 보기로 한다.
 
◎ 3대국부(三大國富)를 낳은 3대부성산(三大釜星山)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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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인촌 김성수 선생의 양택과 선대들 음택의 地相 해설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 선생은 너무도 잘 알려진 분이기 때문에 새롭게 밝혀야 할 내용이 없지만 저희가 인촌 선생의 전생(前生)을 찾고 본즉 구약시대에 부귀영화를 누렸던 솔로몬 왕이기 때문에 부통령 1년으로 끝나지 않고 이승만 대통령에 이어서 제3대 대통령을 했어야 했는데, 1951년 5월에 국회에서 부통령으로 선출된 후 1년만에 사임하였을 뿐 아니라 1955년 2월에 돌아가시고 말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한다면, 전생(前生)관계로 볼 때 이승만 박사의 전생은 사울왕이고 맥아더 장군의 전생은 골리앗을 물리쳤던 다윗이며 김성수 선생의 전생은 솔로몬 왕이기 때문에 이승만 대통령이 사울왕과 다윗의 몫으로 1대와 2대까지 하고 제3대는 전생(前生)이 솔로몬왕인 김성수 선생의 몫인데 부통령 1년만에 사임하고 1955년 2월에 65세로 돌아가시게 됨으로써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에는 전생(前生)관계로 볼 때 솔로몬왕(김성수)의 신복이었던 느밧(신익희)이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급서하고 말았는데, 이러한 궁금증을 인촌 선생의 선대를 모신 음택에서 해소할 수 있었다.


    지금부터는 인촌 김성수 선생이 나고 자란 양택(陽宅)과 선대(先代)들을 모신 음택(陰宅)에 이르기까지 순차적으로 알아보기로 한다.
 

  (1) 북향대지로 유명한 호남의 명문가 인촌 선생의 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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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라북도 고창군 부안면 인촌리(현 봉암리)에는 호남의 거부(巨富)요 명문가로서 궁궐같은 와가들이 지금도 잘 보존되어 있는데, 이 집은 우리 근대사에 거대한 족적을 남긴 인촌 김성수 선생과 민족자본 육성의 수범자인 수당 김연수 선생이 나고 자랐기 때문에 호남의 명문가로 알려져 있다.
   전생(前生)에 부귀영화를 누렸던 솔로몬왕의 현생(現生)으로 오게 된 인촌 김성수 선생이 나고 자란 양택(陽宅)이라는 것을 말 없이도 증명해주고 남음이 있을 정도이다. 보편적으로 어려웠던 시대에 시골 사람들이 살았던 오막살이 집과는 너무나 대조적으로서 전생(前生)과 결부되는 천운(天運)의 위력을 새삼스럽게 느껴볼 수 있었다.


    궁궐처럼 지어진 이 집은 명문가이기 이전에 인촌(仁村) 선생의 조모님 되시는 영일 정씨께서 천석지기 재산으로 만석지기 부자를 이룬 양택(陽宅)이기도 한데, 특이한 점은 대문이 정좌계향(丁坐癸向)이니 북향으로서 지금은 간척지로 변했지만 그 당시에는 생가 근처까지 배가 들어왔으므로 세찬 북풍과 함께 지상학적(풍수지리)으로 가장 꺼리는 서북풍(건해풍)까지 집안으로 파고 들기 때문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북풍(北風)과 이 집은 지상학적으로 어떠한 관계가 있기에 '큰 부자는 북쪽으로 대문이 나 있다'는 속설이 신빙성을 얻을 정도가 되었으니 궁금한 일로서 저희도 북향대지의 신비를 지상학적으로 알아보기 위해 처음으로 2008년 1월 하순부터 인촌이 나고 자란 양택(陽宅)과 선대를 모셔놓은 음택(陰宅)을 둘러보고 크게 깨달은 바 있고 앞으로 지상학(地相學)에 대한 연구를 하실 분들에게는 실질적인 지상학 교본이 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초과학적인 지운(地運)을 필요로 하시는 분들은 일부러 찾아가 볼 특별한 地相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던 것이다.


    원래 창조주께서 우주만상도 우리 인간을 위해서 창조했고 지운발복(地運發福)이 되는 地相도 인류전체를 위해서 창조했으나 선천시대(先天時代)에는 사유운수(私有運數)였다면 후천시대(後天時代)에는 공유운수(公有運數)이기 때문에 명당(明堂)으로 창조된 地相을 찾아가서 묘소에 합장인사 2배(二拜)만 하게 되면 누구라도 神(하나님)과 직관된 천수보살(산신령)이 산소에 모셔진 조상영(祖上靈)을 통해서 지운(地運)을 인간들에게 부여(賦與)해 주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한다면, 상극투쟁의 문왕팔괘도에 입각한 천칙(天則)이 인류의 운명에 크게 작용했던 2007년까지는 조상들을 모신 음택(陰宅)에서 비롯되는 운수(運數)를 동기감응(同氣感應)에 의해서 혈통적인 자손들이 받게 되었지만 상생화합의 정역팔괘도에 입각한 천도(天道)가 적용되는 2008년부터는 혈통관계를 초월해서 누구라도 직접 찾는 사람이 음택(陰宅)의 운수를 받게 되어 있는데, 인촌 김성수 선생의 조상 산소들은 이러한 시대를 대비하여 하늘이 미리부터 준비시켜 놓았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지금부터는 이에 대하여 순차적으로 밝히기로 한다.

  (2) 북향대지의 인촌 생가 地相은 염고북풍형(鹽庫北風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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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북 고창군 부안면 봉암리에 있는 인촌 김성수 선생 생가의 대문이 북향으로 나 있는 호남의 명문가요 북향대지로 유명한 양택(陽宅)이기 때문에 지관(地官)들의 발걸음은 물론이고 관광객들이 거쳐가는 집이기도 하다.
   인촌 김성수 선생 생가의 북향대지(北向大地)는 지상학적으로 볼 때 소금을 산처럼 산적(山積)하여 놓은 소금창고로서 지금은 간척지로 변했지만 예전에는 생가 근처까지 배가 들어올 수 있었던 곰소만이 바로 염전(鹽田)에 해당되고 곰소만에 있는 죽도는 소금을 끌어 모아놓은 소금무더기에 해당되며 인촌 생가와 주산은 소금창고에 해당되는 것이며, 인촌 생가 한쪽 편에 있는 우물에서는 지금도 물이 넘쳐서 흘러나가고 있는데 이 물은 산적(山積)된 소금에서 빠져 나오는 간수에 해당되는 것이다.
    다시 말한다면, 산적된 소금창고는 남풍이 불어오게 되면 소금이 녹아버리게 되므로 북풍이 불어야 하기 때문에 북향대문(北向大門)을 하고 있는 인촌 생가는 염고북풍형(鹽庫北風形)으로서 북향대지(北向大地)가 되는 것이다.


    부언한다면 음택(陰宅)이나 양택(陽宅)도 특별한 地相을 제외하고는 북풍은 좋지 않기 때문에 전부터 북향대지(北向大地)보다는 남향소지(南向小地)를 선호하고 있지만 인촌 생가의 地相은 곰소만이라고 하는 큰 염전에서 만들어진 소금을 가져다가 산처럼 산적(山積)해 놓은 소금창고이기 때문에 북풍이 절대필요한 염고북풍형(鹽庫北風形)의 명당(明堂)으로서 북향대지(北向大地)가 되는 것이다.

  (3) 울산 김씨의 발복지 여흥 민씨의 음택은 운성만월형(雲城滿月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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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남 장성군 북이면 달성리 명정 마을에 위치한 여흥민씨(麗興閔氏) 할머니의 산소는 울산 김씨 발복지로서 김안국 조광조 이언적 이황 조식 등과 함께 도학(道學)의 영수(領袖)로 알려진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선생의 5대조 할머니요 인촌 김성수 선생으로는 18대조 할머니를 모신 음택(陰宅)이다.
   혹자들은 지형이 가마솥을 엎어놓은 것 같다고 하여 복부혈(伏釜穴)이라고 하지만 누구라도 가보면 한눈에 들어오는 모습이 두둥실 떠오르는 둥근 달의 형상으로서 멀리 아득하게 바라다 보이는 구름 같은 성 즉 운성(雲城)을 안산(案山)으로 한 운성만월형(雲城滿月形)이다.
  地相의 신비(神秘)를 알아보기 위해 다니다 보면 달이 구름에 가려서 반쯤 보이는 운중반월형(雲中半月形)은 더러 있지만 구름으로 성을 이룬 운성(雲城)을 안산(案山)으로 하여 두둥실 떠 있는 밝은 달의 형국 즉 운성만월형(雲城滿月形)의 보기 드문 명당(明堂)으로서 멀리 아득하게 바라보이는 안산(案山:입암산줄기)은 너무도 길게 느껴지며 지상학적으로 창조된 달에 올라가 보면 마음부터가 맑고 밝게 느껴지는데, 긴 장(長) 자와 재 성(城) 자의 장성군(長城郡)의 지명과 밝을 명(明) 자와 당할 정(丁) 자를 쓰는 명정(明丁) 마을의 지명이 운성만월형(雲城滿月形)의 地相에 근거하여 주어진 지명으로 사료된다.


    구약시대에 처음으로 자아완성(성불)하여 하늘과 종적관계를 수립했던 야곱도 요셉의 꿈 해몽을 할 때 해와 달을 부모님으로 해석하였듯이, 해와 달은 경우에 따라서 국부(國父)와 국모(國母)를 상징하기도 하고 천부(天父)와 천모(天母)를 상징하기도 하는데, 복의 근원이신 천모(天母) 즉 성신(聖神:하늘어머니)을 상징하기도 하기 때문에 여흥 민씨 할머니 음택(陰宅)이 호남제일의 명문가로 알려진 울산 김씨의 발복지(發福地)로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인촌 김성수 선생의 18대조 되는 여흥민씨(麗興閔氏)가 장성군의 명당을 대표하는 운성만월형(雲城滿月形)에 모셔지기까지는 기막힌 사연이 있다. 조선왕조 초기에 태종 이방원이 왕권강화를 목적으로 외척을 배척할 때 처남인 민무구 민무질 형제의 옥사에 연루되어 이방원 부인 원경왕후 민씨와 4촌형제가 되는 여흥민씨의 남편 김온(金穩)이 죽게 되자 아들 3형제를 데리고 한양을 떠나 전남 장성군 황룡면 맥동 마을에 피신하여 정착하게 되면서 아들 3형제를 훌륭하게 길러낸 여장부이기도 한 여흥민씨 할머니가 자신의 신후지지(身後之地)로 직접 잡았다는 설과 하서(河西) 선생의 조부가 당대의 유명한 지관부인을 유혹하여 잡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이야기인즉 하서(河西) 선생 조부는 당대의 유명한 박 풍수에게 공을 들이며 명당을 하나 잡아달라고 했으나 응답이 없었다. 온갖 선물을 장만하여 집을 여러 차례 찾아갔지만 허사였다. 본래 지관은 조선 팔도를 다 돌아다니는 직업이므로 오랫동안 집을 비우기 일쑤였으므로 집을 찾아가도 못 만나기가 태반이었고 만난다고 해도 지관은 좀처럼 말을 해주지 않았다. 하서 선생 조부는 지관의 부인을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대단한 미남이었던 그는 여러 번 지관의 집을 들락거리면서 외롭고 쓸쓸한 지관부인과 친근한 관계가 되었다. 마침내 지관 부인은 남편이 잡은 자리를 알아내서 알려주겠노라고 약속을 하였다.

 

랫동안 출타했다가 돌아온 남편에게 부인은 "당신의 신후지지(身後之地)가 아무리 명당이라도 내가 알고 있어야 만약 당신이 먼저 죽더라도 묘를 써줄 것 아니냐"며 대명당 자리를 물어보자 지관은 일리가 있는 말이라며 부인에게 자신만 알고 있었던 명당의 위치를 말해주었다. 지관이 또 명당을 잡기 위해 멀리 길을 떠나자 부인은 하서 조부를 불러 복부명당의 위치를 전해주었다. 하서 조부는 바로 민씨 할머니 묘를 이장하였다. 지관이 먼 출타에서 돌아오는 길에 명정 마을에 있는 자신의 신후지지를 확인하러 들렸는데 이미 다른 사람이 묘를 써버린 것이 아닌가? 지관은 탄식을 하면서 "세상에 나말고도 천하 명풍이 또 있었구나!"하면서 감탄과 실망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울산 김씨 가승보에 의하면 여흥 민씨 할머니는 학문에도 밝았을 뿐 아니라 당시 부친과 친분관계를 맺고 있던 무학대사(無學大師)에게 천문(天文)과 복서(卜筮), 지리(地理)를 수학하였고 그 이론을 정립하여 하소결(荷沼訣)이란 향법에 관한 지가서(地家書)를 저작(著作)할 정도로 풍수지리에도 매우 해박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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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은 후손들에게 남긴 축원예언(祝願豫言)으로서 '내가 죽으면 방장산(方丈山) 기슭의 명정 마을에 묻어다오. 그러면 말을 탄 자손이 밀등에 가득하리라. 내가 정한 맥동터에서 선현(先賢)이 탄생하는데 필암(筆岩)은 필시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는 사원이 들어설 것'이라는 축원예언(祝願豫言) 중에서 '말을 탄 자손이 밀등에 가득하리라'는 비문이 운성만월형(雲城滿月形)의 地相과 결부되며 명당의 기본인 좌청룡?우백호?남주작?북현무는 완벽할 정도다.
    운성만월형(雲城滿月形)으로 창조된 울산 김씨의 발복지이기도 한 명당(明堂) 안산(案山)으로서 산소에서 멀리 아득하게 구름처럼 바라다 보이는 입암산(笠岩山) 줄기를 백양사 나들목(I?C)에서 바라보게 되면 백양사 쪽의 장자봉이 백양(白羊)의 머리에 해당되고 중앙부위인 시루봉에서 입암산 쪽의 양(羊) 꼬리까지 한 일(一) 자로 용의 몸처럼 길게 뻗어나간 이 산 전체의 地相은 백양(白羊)의 머리(頭)와 꼬리(尾)에 용(龍)의 몸을 한 백양용마(白羊龍馬)를 산소의 안산(案山)으로 하여 타고 앉아 있으니 '말을 탄 자손이 밀등에 가득하리라'는 여흥 민씨 할머니의 후손들에 대한 축원예언(祝願豫言)이 운성만월형(雲城滿月形)의 명당지상(明堂地相)과 결부된다는 것이다.


    부언한다면, 장성군을 대표하는 운성만월형(雲城滿月形)의 명당(明堂)에서 멀리 보이는 안산(案山)이 백양용마형(白羊龍馬形)인데 이를 타고 있으니 '말을 탄 자손이 밀등에 가득하리라'는 축원예언(祝願豫言)대로 도학(道學)의 영수 하서(河西) 선생을 비롯해서 정치적으로는 제2대 부통령 인촌(仁村) 선생, 법조계로는 김병로 대법원장, 김상협 국무총리 등 쟁쟁한 인물들이 줄을 잇고 있기 때문에 울산 김씨가 호남의 명문가로 이름이 난 것이다.

  (4) 인촌의 9대조(김창하) 음택은 웅포자궁형(雄抱子宮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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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위에 있는 사진은 전북 순창군 복흥면 자포리(雌抱里) 인근에 있는 화개산(華蓋山)으로서 누가 보아도 햇빛을 가리기 위해 여성들이 쓰는 양산(陽傘)처럼 보이는데, 산의 지명 역시 빛날 화(華) 자와 뚜껑 개, 우산 개(蓋) 자를 쓰는 화개(華蓋)는 임금이나 왕비가 들로 나설 때 볕을 가려주기 위해서 나인들이 펼쳐주는 비단으로 만든 커다란 일산(日傘)을 가리킨 것으로서, 화개산(華蓋山)은 지명이 그 뜻을 내포하고 있듯이 보편적으로 임금 아니면 세자가 쓰는 일산(日傘)형상이라는 것이다.


    다음으로 좌편 하위의 산소 사진은 화개산(華蓋山) 중턱에 모셔놓은 인촌 김성수 선생의 9대조인 김창하(金昌夏) 공을 모셔놓은 음택(陰宅)으로서 삼천년향화지지(三千年香火之地)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이곳 저곳에서 지사들이 찾아오고 있는데, 명당의 기본이기도 한 좌청룡?우백호?북현무?남주작은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완벽하다.
    암컷 자(雌) 자를 쓰는 자포리(雌抱里)의 지명에서부터 일산형상(日傘形狀)의 화개산(華蓋山)은 햇빛을 가리고 있는 주인공이 특별하게도 임금이나 세자가 아닌 왕비라는 지상학적 증거로서 울산 김씨들 묘소의 안산(案山)을 이루고 있는 나지막하면서도 길다란 산능선은 남성의 옥경(玉莖)에 해당되고 옥경 바로 안쪽에 쌍벽을 이루고 있는 작은 산봉우리 두 개는 여성의 소음순(小陰脣) 두 개에 해당되며 소음순 두 개 사이에 고여 있는 지호수(池湖水)는 음양교배 즉 음양합궁(陰陽合宮) 후에 흘러나온 분비물에 해당되며 울산 김씨의 산소자리는 여성의 자궁(子宮)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한다면, 화개산(華蓋山)은 왕비에게 볕을 가려주기 위해 나인들이 씌워주는 일산(日傘)이 되고 울산 김씨들의 산소는 자궁(子宮)에 해당되며 산소의 안산을 이루고 있는 여러 모습들은 남성의 옥경(玉莖)이 여성의 옥문(玉門) 입구의 질구를 가리고 있는 소음순을 감싸고 있기 때문에 지상학적으로 표현한다면 웅포자궁형(雄抱子宮形)이라고 한다.


    이렇게 남성의 옥경(玉莖)이 여성의 옥문(玉門)을 감싸고 있는 웅포자궁형(雄抱子宮形)으로 창조된 울산 김씨들의 산소는 할아버지와 손자의 산소위치가 상하로 바뀌기도 했는데, 아기집이기도 한 자궁(子宮)에는 아기들이 차례로 길러나가는 곳이기 때문에 선대(先代)가 입구에 있고 후대(後代)가 안에 있는 것은 역장(逆葬)이 아니라 순리로서, 지상학적 이치로 볼 때 왕비의 자궁을 통해서 낳게 되는 아들이나 딸은 왕자나 공주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울산 김씨들 중에 훌륭한 인물들이 많이 나오게 된 것이다.

  (5) 인촌 증조모님 음택의 地相은 쌍치담수형(雙置潭水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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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북 순창군 쌍치면 시산리 복평(洑坪)에 있는 인촌 김성수 선생의 증조모 전의 이씨 음택(陰宅)의 地相은 양편에 제방(堤防)을 쌓고 마지막으로 가운데 제방을 쌓아서 댐을 막아 호수에 많은 물을 저장시키는 쌍치담수형(雙置潭水形)으로서, 산소 전경(全景)에 잘 드러나 있듯이 양쪽의 제방이 서로 닿을 듯이 가깝게 쌍치(雙置)를 이루고 있으며 쌍치 사이로 멀리 보이는 담양군에 위치한 산이 쌍치로 된 두 제방 사이를 막아줌으로써 담수(潭水)가 이루어지는데 깊을 담(潭) 자를 쓰는 담양군(潭陽郡)의 지명과도 무관치 않을 것으로 사료된다.


    쌍치면(雙置面)에 있는 쌍치담수형(雙置潭水形)의 특수한 地相이 더욱 좋게 보이는 것은 명당의 기본이기도 한 좌청룡?우백호?북현무?남주작이 너무도 거대하고 웅장하게 짜여져 있다는 점이며, 이러한 지상운세(地相運勢)에 힘입어 인촌의 동생 수당 김연수 선생이 일찍부터 해리면과 삼원면 일대에 간척사업을 벌여 농장과 염전을 이루어 인촌의 고대설립을 도왔을 뿐 아니라 전북의 향토기업인 삼양그룹의 토대이자 인촌 선생의 재정적 후원자가 되었던 것이다.

  (6) 인촌 증조부님 음택의 地相은 비룡망해형(飛龍望海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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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북 부안군 변산면 대항리 자미 마을 옆에 있는 산봉우리에는 인촌 김성수 선생의 증조부님 되시는 김명환(金命煥) 공의 산소가 있는데, 북쪽으로는 변산해수욕장이 한눈에 들어오는 경치가 너무나 좋기 때문에 경탄이 절로 나올 정도로서 비룡망해형(飛龍望海形)의 地相을 마련하기 위해서 수천 리를 달려온 용(龍)이 바다를 만나 승천하기 위해서 힘차게 약진하려는 형국이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병좌임향(丙坐壬向)으로 북쪽에 위치한 변산해수욕장을 향했어야 할 산소가 묘좌유향(卯坐酉向)으로 서쪽으로 안대(案對)를 하였으니 비룡망해형(飛龍望海形)의 地相과는 너무도 맞지 않는 좌향으로서 변산해수욕장 바다 가운데 나란히 있는 두 개의 섬이 바로 용이 승천할 때 디딤돌 발판이기도 한데, 망망대해를 앞에 놓고 방향을 바꾸어버리고 말았으니 용(龍)이 승천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앞으로 때가 되면 지상학 공부는 기본필수가 된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후대들이 지상학 공부를 하는 데 있어서 지상학교본(地相學敎本)이 될 수 있다고 확신하였기에 인촌 선생의 양택(陽宅)에서부터 조상들을 모신 음택(陰宅)을 빼놓지 않고 찾아 본 결과 지상학교본으로 손색이 없었지만 인촌 선생의 증조부님 산소만 방향과 자리가 크게 빗나가 있었다.


    백두산에서 시작된 용처럼 생긴 산줄기가 방방곡곡을 뻗어 내려갔지만 '용이 천리를 뻗어 내려도 혈자리는 단 한 자리'라는 천리행룡일석지지(千里行龍一席之地)의 풍수원칙에 입각하여 일명당일묘(一明堂一墓)로서 합장(合葬)도 하지 않고 단장(單葬)으로 조상들의 음택(陰宅)에 남다른 정성을 다했던 인촌 선생의 가문에서 증조부님 산소만 비룡망해형(飛龍望海形)의 地相에 빗나가게 산소를 모셨으니 아쉬울 뿐이다.


    본책자 제3장 3에서 언급하였듯이, 이승만 박사의 전생(前生)은 사울왕이었고 맥아더 장군의 전생은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이었으며 김성수 선생의 전생은 솔로몬왕이었기 때문에 이승만 대통령께서 사울왕과 다윗의 몫까지 제1대와 제2대 대통령을 하고 제3대는 전생이 솔로몬왕이었던 김성수 선생께서 하게 되어 있는데, 부통령 1년으로 사임하고 1955년 2월에 65세의 아쉬운 연세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으니 전생(前生)과 결부시켜 보았을 때 궁금한 일이었는데, 인촌의 증조부님을 모신 비룡망해형(飛龍望海形)의 음택(陰宅)에서 나름대로는 감을 잡을 수 있었다.


    이에 대하여 잠깐 언급한다면, 지금부터 400년 전에 하늘이 남사고 선생을 통해서 섭리의 방향을 미리 밝혀놓은 예언서에 의하면 이씨왕조는 28대로 막을 내리게 될 것을 '四七君王(4×7=28)'으로 예언하여 놓았고 한민족이 36년 동안 나라 없는 민족으로 살게 될 것과 일본은 동남아 일대를 장악하지만 미국에 의해 몰락하게 될 것을 '三十六年無主民?日本東出西山沒'이라고 명시하여 놓았는데 일푼의 오차도 없이 그대로 적중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전주 이씨(이성계)가 개국했던 이씨조선에 이어 새롭게 전주 이씨(이승만)가 등장하여 12년을 더하게 될 것을 '신증이씨12년(新增李氏十二年)'으로 이미 예언하여 놓았는데, 인촌의 증조부님을 비룡망해형(飛龍望海形)의 대명당(大明堂)에 합당하게 모셨다면 그 운세는 하늘도 막을 수 없는 일로서 예언섭리(豫言攝理)에 차질을 가져올 수밖에 없기 때문에 하늘이 영계(靈界)를 통해 심유원력(心有原力)을 발동시킴으로써 지관(地官)의 마음을 움직여서 그릇되게 했다는 결론을 얻게 된 것이다.


    결론적으로 볼 때,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 선생의 전생(前生)은 구약시대에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부귀영화를 누렸던 솔로몬왕인데 부통령도 1년만에 사임했고 대통령은 하지도 못하고 별세함으로써 당대에 누리지 못했던 부귀영화는 후대에서 누리게 되어 있기 때문에 자녀분을 9남3녀나 두게 되었을 뿐 아니라 후손들이 대대로 부귀영화를 누리게 되는 것이며, 대표적인 사례(事例)로서 인촌 선생의 손자 되는 김병국 외교안보수석의 경우를 들 수도 있겠으나 이러한 섭리를 알지 못하는 분들로부터는 부자수석으로 눈총을 받고 있는 실정이기도 하다.

  (7) 인촌 조모님 음택의 地相은 신혼초야형(新婚初夜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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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북 고창군 아산면 반암리 호암(壺岩) 마을에는 인촌 선생의 조모님 되시는 영일 정씨의 음택(陰宅)이 있는데, 너무도 신비(神秘)한 地相이기 때문에 神의 계시 없이 학문적인 지식으로는 찾아내기 어려운 형국이다.
    일명 병바위라고도 하는 호암(壺岩)은 도선국사의 풍수문답 옥룡자유산록(玉龍子遊山錄)에 호남대지가 숨어 있다고 하여 여러 지관(地官)들이 호암 마을에서 명당을 찾다보니 이곳저곳에 산소가 너무 많아서 양택(陽宅)과 음택(陰宅)이 공존하고 있는 실정이다.
    지상학적인 견지에서 잠깐 알아본다면, 마을 앞 한편에는 빈 술병을 거꾸로 세워놓은 것 같기도 한 병바위 즉 호암(壺岩)이 있고 병바위 옆에는 술병을 받치는 소반바위, 술잔 같은 옥배사(玉杯砂)가 있는가 하면, 백호쪽 산능선에는 손님이 타고 왔다는 말안장바위, 서서 구경한다는 선바위, 관바위, 탕건바위, 가위바위, 선인봉 등이 있고 내백호에는 창고와 노적가리도 있는 부잣집으로서 호암 마을의 주산(主山)은 잔칫날 마당에 치는 차일(遮日)과 같다고 하여 차일봉이라 하는데, 오늘까지의 풍수지리에서는 신선이 잔칫날 술에 취하여 누워 있는 선인취와형(仙人醉臥形)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잔치집의 주인공은 누구이며 무슨 잔치를 했다는 말인가?
    호암(壺岩) 마을의 신비한 地相은 옛날 구혼식(舊婚式)의 내적인 진풍경(珍風景)을 그대로 펼쳐 놓았을 뿐 아니라 신랑신부가 혼인식을 마치고 첫날밤을 맞이하게 되는 신혼초야형(新婚初夜形)으로서 차일(遮日)을 치고 혼인잔치를 하였으니 호암(壺岩)은 비어 있는 술병이 되는 것이며 선인봉은 신랑을 뜻하고 말안장은 신랑이 타고 온 말을 뜻하며 관바위는 신랑의 사모관대를 뜻하는 것이다.


    그리고 첫날밤을 보내려면 신랑신부의 옥경(玉莖)과 옥문(玉門)이 핵심이 되는 것인데, 남성의 옥경이 발기되어 우뚝하게 솟아 나온 것처럼 보이는 병바위 즉 호암(壺岩)이 바로 신랑의 옥경(玉莖)에 해당되고 인촌 선생의 조모님(영일 정씨)을 모신 음택(陰宅)이 바로 신부의 옥문(玉門)에 해당되기 때문에 영일 정씨 음택(陰宅) 하단 아래쪽에는 흙이 질퍽할 정도로 물기가 있어 보이는데 좌향은 간좌곤향(艮坐坤向)으로 하여 호암(壺岩)을 정면으로 마주 대하고 있다.


    다시 말한다면, 신랑신부가 혼인식과 잔치를 끝내고 첫날밤을 맞이하는 너무도 신기하고 오묘한 형국으로서 신랑신부는 보이지 않고 신랑의 표상이기도 한 옥경(호암)과 신부의 표상이기도 한 옥문(영일 정씨 음택)이 서로 마주하고 있는 진풍경이 신혼초야형(新婚初夜形)의 地相이기도 하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남성의 옥경(玉莖)은 외적인 양(陽)이기 때문에 드러나 있지만 여성의 옥문(玉門)은 내적인 음(陰)이기 때문에 가리어 있어야 하는데, 영일 정씨의 음택(陰宅)은 가정집처럼 담장을 사방으로 높다랗게 쌓아서 대문까지 만들어 놓았으니 이 또한 금상첨화(錦上添花)로서 호남대지(湖南大地)의 면모를 완벽하게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부언한다면, 도선국사의 옥룡자유산록에 언급된 내용 중에 '호남대지 여기로다 좌우 신선 춤을 추고 옥호(玉壺)는 뛰는 구나'라는 문장에서 기뻐서 춤을 추는 좌우 신선은 신랑신부를 뜻하고 옥호(玉壺)는 신랑의 옥경(玉莖)을 뜻할 뿐 아니라 호암(壺岩)을 뜻하기도 하는 바로서 잔치가 끝나고 신랑신부가 첫날밤에 음양합궁(陰陽合宮)을 이루니 옥호(玉壺) 즉 옥경이 뛰게(요동치게) 된다는 뜻이다.

  (8) 인촌 조부님 음택의 地相은 선녀태교자궁형(仙女胎敎子宮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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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북 고창군 아산면 삼인리(全北 高敞郡 雅山面 三仁里) 선운사(禪雲寺) 뒤에 있는 선운산(禪雲山) 중턱의 옛날 백련암이 있었던 암자터 바로 뒤에는 인촌 김성수 선생의 조부님 김요협(金堯莢) 공의 음택(陰宅)이 있는데, 이 산소는 누가 보아도 찬사를 아낄 수 없는 풍수지리의 이상향(理想鄕)이라고 할 수 있다.
    풍수지리의 이상향(理想鄕)이라고 할 수 있는 명당(明堂)을 소지(所持)하고 있는 선운산(禪雲山)은 지명에서부터 고요할 선(禪) 자와 꿈과 이상을 뜻하기도 하는 구름 운(雲) 자가 그 뜻을 내포하고 있듯이, 선녀가 자궁에서 자라고 있는 태아(胎兒)를 위해 태교(胎敎)를 하는 선녀태교자궁형(仙女胎敎子宮形)으로서, 수리봉이라고도 하는 선운산 정상은 신사임당처럼 얹은머리를 한 여인의 머리에 해당되고 김요협(金堯莢) 공의 음택(陰宅)을 가까이서 좌우로 감싸고 있는 좌청룡과 우백호는 태교하는 여인의 자궁벽(子宮壁)에 해당되며 음택(陰宅)은 자궁(아기집)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선녀태교자궁형(仙女胎敎子宮形)으로 창조된 선운산(禪雲山)의 地相은 태교(胎敎)하는 여인상으로서, 서양을 대표하는 여인상의 표상(表象)으로는 사명(使命)결실로 예수님을 탄생시킨 성모(聖母) 마리아를 들 수 있고 동양을 대표하는 여인상의 표상으로는 복중교육(腹中敎育)의 결실로 율곡 선생을 탄생시킨 성모(聖母) 신사임당을 들 수 있는데, 얹은머리를 하고 있는 선운산지상(禪雲山地相)의 자태(姿態)는 동양적인 성모(聖母) 신사임당(申師任堂)의 상징적 자태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다음은 아산(雅山)에 대한 지상학적 천비(天秘)로서 한반도의 방방곡곡에 주어진 지명(地名)은 거의가 지상(地相)에 근거하여 주어진 이름이기 때문에 지명을 계시적 차원에서 이치적으로 파고들면 신비한 地相을 알 수 있는데, 선운산(禪雲山)과 가까운 아산면(雅山面)의 바를 아 또는 맑을 아(雅) 자와 결부되는 산으로서 선녀태교자궁형(仙女胎敎子宮形)의 음택(산소)에서 정면으로 바라다 보이는 4정봉(四正峯)의 안산(案山)이 너무도 바르고 맑게 보이는 인경봉?구황봉?노적봉?형제봉에 근거한 산의 명칭이 바로 아산(雅山)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삼인리(三仁里)는 바르고 맑고 떳떳하게 창조된 4정봉(인경봉?구황봉?노적봉?형제봉)을 바라보면서 태교(胎敎)를 하게 되면 미?진?선(美?眞?善)을 갖춘 삼인(三仁) 즉 성인(聖人)을 탄생시킬 수 있다는 뜻으로 주어진 지명이 선운산(禪雲山)을 기조로 하는 아산면(雅山面) 삼인리(三仁里)의 지상학적 명칭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복중교육(腹中敎育)이라고 하는 태교(胎敎)는 지금부터 3000년 전에 주나라의 임금이었던 문왕(文王)의 어머니였던 태임(太任)이 원조(元祖)이기도 한데 태교(胎敎)를 잘해서 낳게 된 문왕(文王)이 선천시대(先天時代)에 인류의 운명을 좌우했던 문왕팔괘도(文王八卦圖)를 정립할 수 있었다는 것은 성인(聖人)의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문왕(文王)의 어머니였던 태임(太任)의 윤회환생(輪廻還生)으로 이땅에 오게 된 신사임당께서 태임(太任)의 태교를 본받아 시행했던 복중교육의 결실로서 '동방의 공자'로 칭송 받았던 율곡 선생을 탄생시켰으니 예나 오늘이나 '태교(胎敎)'라고 하는 복중교육의 필요성은 인정하는 편이지만 기본원칙을 놓고는 혼돈스러울 지경이다. 


   양택(陽宅)이나 음택(陰宅)에서 드러나 보이는 산의 모양 따라서 실질적으로 나타난 결과는 적지 아니하지만 한 가지 실례만 든다면 여수시 소라면 현촌리 중촌마을의 경우 전체 75 가구 가운데 35 가구에서 38쌍의 쌍둥이를 낳아 세계적으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데, 중촌마을에서 아득하면서도 환상적으로 바라보이는 쌍봉산(고락산)이 태교(胎敎)에 작용했다는 것이 지상학적 판단이다.


    그런데 더욱 신기한 일은 쌍봉산 정상에 전선철탑을 세운 1979년 이후로는 쌍둥이가 태어나지 않는다고 하므로 산이 어떻게 보이느냐에 따라서 태교에 미치는 영향도 달라지게 된다는 증거이기도 한데, 양택(집)이나 음택(산소)에서 바라다 보이는 산에 따라서 병신자식도 생기고 부(富)나 귀(貴)를 타고나는 자손도 태어난다는 것은 풍수지리를 통해서 너무 많이 입증된 사실로서 산을 바라보는 그 자체가 태교(胎敎)의 핵심이 되는 것이며,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언행을 삼가는 일 등은 부수(附隨)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실체(形相實體)이자 인간형상으로 창조된 한반도는 70%가 산으로 창조되어 있는데, 21세기의 정신문명시대는 내다보지 못하고 20세기를 주도했던 물질문명이 전부인줄 알고 개발과 발전이라는 명목으로 함부로 훼손하는 창조역천(創造逆天)을 자행하고 있으니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다시 말한다면, 복중교육(腹中敎育)의 시범교육장으로 창조하여 놓은 선운산(禪雲山)의 선녀태교자궁형(仙女胎敎子宮形) 地相과 문왕(文王)의 어머니인 태임(太任)의 윤회환생으로 이땅에 오게 된 성모(聖母) 신사임당의 태교를 본보기로 하는 복중교육이 절실하게 필요한 시대가 21세기로 접어든 오늘의 세상이기도 하다.


    결론적으로 볼 때, 인류역사 출발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죄악과 전쟁과 질병과 가난과 고통으로 인한 불행이 그칠 날이 없었던 선천부계시대(先天父系時代) 6000년의 역사는 神(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해방 이후 한민족사 60년과 제6공화국까지의 666의 섭리로 매듭짓고 2008년부터는 천지운세(天地運勢)가 후천모계시대(後天母系時代)로 돌입했기 때문에 민주주의도 공산주의도 제국주의도 아닌 모정주의사상(母情主義思想)을 기조로 하는 후천모계시대를 열어서 이땅에 자유와 평화와 사랑과 이상과 행복이 넘쳐흐르는 이상세계(지상천국)를 건설할 때가 도래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상세계 즉 지상천국(불국정토)을 건설하여 불행한 세상을 영원히 물리치기 위해서는 여성들이 서양을 대표하는 여인상의 표상이기도 한 성모(聖母) 마리아처럼 성인(예수님)을 탄생시킬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하고 동양을 대표하는 여인상의 표상이기도 한 성모(聖母) 신사임당처럼 성인(율곡 선생)을 탄생시킬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하는데, 바로 바르고 맑고 환상적으로 보이는 산이 태교의 핵심이 되는 것이며 이와 병행하는 생활지침은 성모(聖母) 신사임당께서 본보기노정을 가셨다는 것이다.


    부언한다면, 고요하고 포근한 선운산(禪雲山)에 후천모계시대의 어머니들이 가야 할 숭고한 길을 선녀태교자궁형(仙女胎敎子宮形)의 地相으로 창조하여 놓았으니 神(하나님)의 무한한 창조신비(創造神秘)에 감복할 따름이다.

  (9) 인촌 양부님 음택의 地相은 백양용마제단형(白羊龍馬祭壇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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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남 장성군 북하면 백양산(白羊山)에 있는 백양사(白羊寺)를 감싸고 있는 산으로서 봉우리의 이름은 백학봉?상왕봉?사자봉?가인봉?도집봉 등으로 형성된 산봉우리 중에서 백학봉과 상왕봉의 중간 지점 하단 9부능선 쯤에는 인촌 김성수 선생의 양부(養父) 되시는 김기중(金祺中) 공의 음택(陰宅)과 하단 별도의 산자리에는 인촌의 본부인 고광석(高廣錫) 여사의 음택(陰宅)이 있다.
   인촌 선생의 양부 김기중(金祺中) 공의 음택(陰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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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학적으로 본다면 백양(白羊)의 머리와 두 다리에 몸은 용(龍)의 몸으로 창조된 백양용마(白羊龍馬)를 제물(祭物)로 쓰기 위해서 창자인 내장(內臟)을 꺼내놓은 산이 바로 내장산(內藏山)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하늘 앞에 번제(燔祭)를 위해 내장은 내장산에 꺼내놓고 길다란 백양용마(白羊龍馬)를 반으로 구부려서 제단(祭壇)에 올려놓고 제를 올리는 형국으로서 지상학적으로 이름을 정한다면 백양용마제단형(白羊龍馬祭壇形)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본다면, 현재 표지판의 백학봉에서 백양사 쪽으로 내려가는 길 가까이 오른쪽 편에 아슬아슬한 절벽을 이루고 있는 커다란 바위봉우리로 형성된 백암(白岩)이 백양(白羊)의 머리에 해당되고 다시 백학봉에서 상왕봉?사자봉까지 길게 구부러진 산등성이는 용(龍)의 몸에 해당되며 도집봉과 가인봉으로서 병행하는 두 줄기는 양(羊)의 두 다리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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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한 인촌의 양부 김기중 공의 음택(陰宅)에서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가인봉 상단에 과일처럼 둥글게 보이는 모양은 유교식 제사상에 기본이 되는 과일류로서 사과?배?감 등의 둥근 과일을 뜻하기고 하고 몸뚱이는 용(龍)의 형상으로 창조되어 있기 때문에 용이 지니고 있는 여의주를 상징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부언한다면, 구약성서에도 아브라함이 이삭 대신 양(羊)을 잡아서 하늘 앞에 번제(燔祭) 하였듯이 백양용마(白羊龍馬)를 번제의 제물로 쓰기 위해 내장은 내장산에 꺼내놓고 길다란 몸통을 구부려서 제단(祭壇)에 차려놓고 보니 구부러진 곳에서 피가 떨어지는 형상으로서 고광석 여사 산소 우편에 옛날 암자터가 있는데 암자터 하단의 암벽에서는 피가 떨어지듯 맑은 물이 조금씩 흘러내리고 있으며, 백양의 머리가 잘 보이는 백양사 인근 평평한 곳에는 국기단(國祈壇)을 마련하여 놓고 국가적으로 질병이나 전염병이 창궐했을 때는 제를 올린다고 한다.


    이렇게 서양의 제물(祭物)을 대표하는 백양(白羊)과 동양에서 숭상하는 용(龍)과 유교식 제사를 대표하는 과일까지 함께 차려놓고 하늘 앞에 천제(天祭)를 올리는 제사장(祭司長)의 자리가 바로 백양용마제단형(白羊龍馬祭壇形)의 地相에서는 명당(明堂)이 되는 것이다.


    차제에 필히 밝히고 가야 할 내용이 있다면, 백양사(白羊寺)를 감싸고 있는 백양용마제단형(白羊龍馬祭壇形)의 地相은 천제(天祭)를 올리기 위해 백양용마형(白羊龍馬形)의 내장은 내장산에 꺼내놓고 몸통 전체만 제단에 올려놓은 형국이지만 이와 병행하여 가인봉 바로 너머에는 살아서 서 있는 백양용마형(白羊龍馬形)의 地相을 갖추고 있는데 인간들이 잘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부터는 이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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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양(白羊)의 머리(頭)와 꼬리(尾)에 용(龍)의 몸으로 창조된 백양용마형(白羊龍馬形)으로서 살아서 서 있는 地相은 백양사 나들목(I?C)에서 너무도 잘 보이는 산으로서 백양사 쪽의 장자봉이 백양의 머리에 해당되고 시루봉은 용의 몸에 해당되며 입암산(笠岩山) 쪽의 꼬리는 양의 꼬리처럼 꼬리 끝이 위로 향해 있다는 것이다.


    부언한다면, 백양용마형(白羊龍馬形)의 내장(內臟)을 꺼내놓은 내장산(內藏山)은 백양의 내장처럼 크고 작은 산줄기가 이리저리 사방 좌우전후로 얽혀 있는 것 같지만 봄이면 진달래꽃이 만발하여 붉게 물들여주고 가을이면 붉은 단풍으로 아름답게 장식하여 백양용마형(白羊龍馬形)의 내장(內臟)을 감추어주는 내장산(內藏山)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전북 정읍시 내장면에 있는 내장사의 모습

  (10)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의 양택과 음택에 대한 地相
 

반기문 사무총장의 고향 행치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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木杏結實形의 행치마을 地相  
   충북 음성군(陰城郡) 원남면(遠南面) 상당리(上唐里) 행치(杏峙) 마을은 세계적인 인물로 등장한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의 고향 마을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발걸음이 그칠 날이 없는데 저희도 2008년 2월 중순경에 행치 마을을 방문하게 되었다.


    반기문 사무총장의 고향인 행치(杏峙) 마을의 地相은 은행 행(杏) 자와 산우뚝할 치(峙) 자를 쓰는 지명에 내포되어 있듯이 은행나무에 열매가 맺혀 있는 목행결실형(木杏結實形)이다.
    우뚝하게 보이는 행치 마을의 주산(主山)은 은행나무에 해당되고 주산의 8부 능선쯤에 열매처럼 둥글게 보이는 산봉우리는 은행열매에 해당되는 것이며, 은행이 결실된 산 능선이 마을쪽으로 내려오면서 선조들을 모시는 문중묘지를 이루어놓고 계속 이어진 산줄기가 반기문 사무총장의 집터에서 멈췄기 때문에 목행결실형(木杏結實形)의 地相으로서는 명당이 되는 것이다.

  ◎ 반기문 총장의 조상 산소의 地相은 주룡승천형(珠龍昇天形)
 

광주 반씨들의 조상 산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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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북 음성군 원남면 하로리(忠北 陰城郡 遠南面 下老里) 가막산 기슭에 있는 광주 반씨들의 조상을 모신 음택(陰宅)은 음성군을 대표할 수 있는 대지(大地)로서, 지상학적으로 본다면 용이 혀 끝에 여의주를 물고 하늘로 승천하는 주룡승천형(珠龍昇天形)이다.
    충북 음성(陰城)에 있는 광주 반씨들의 조상 산소를 가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명당의 기본으로 갖추고 있는 좌청룡?우백호?남주작?북현무로 짜여진 형국(形局)이 너무나 커서 마치 세계지도를 펴놓고 보는 것처럼 남북아메리카(좌청룡)와 아프리카대륙(우백호)과 일본열도(남주작)와 중국대륙(북현무)을 연상케 하는데 혀끝에 여의주(如意珠)까지 소지하고 있으니 지상섭리(地相攝理)로 볼 때 세계적인 인물이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반충익 공 산소 뒤의 여의주 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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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알바위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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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의주(如意珠)를 몰고 승천하는 주룡승천형(珠龍昇天形)이기 때문에 좌청룡과 우백호는 구름으로 형성되어 있는데, 가막산을 주산(主山)으로 하여 길게 뻗어 내린 능선을 타고 산소에서 200m 쯤 오르다 보면 계란처럼 생긴 바위로 형성된 용알이 표출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건룡(乾龍)이 아닌 곤룡(坤龍)으로서 음기 음(陰) 자의 음룡(陰龍)이라고 할 수 있는데, 구름처럼 형성된 크고 넓은 좌청룡과 우백호가 음룡(陰龍)을 중심으로 성(城)을 쌓아놓은 듯이 감싸고 있으니 알고 보면 음성군(陰城郡)이라는 지명(地名)이 음성군을 대표하는 주룡승천형(珠龍昇天形)의 地相을 근거로 하여 주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별로 알려지지도 않은 시골에서 태어난 사람이 유엔 사무총장이라는 세계적인 인물로 등장하기까지는 보이지 않는 힘으로서 목행결실형(木杏結實形)의 양택(陽宅) 지운과 주룡승천형(珠龍昇天形)의 음택(陰宅) 지운이 크게 작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저희가 미처 가보지 못했던 국가적인 정치지도자들의 양택(陽宅)과 음택(陰宅)을 2008년 2월에 돌아보면서 크게 느낀 점이 있다면 오늘날 기독교적인 서양의 문물(文物)을 받아들이다보니 지성인으로 자처하는 분들에게는 지상학(풍수지리)이 우습게 여겨지고 있지만 정치지도자들의 양택과 음택을 살펴본 결과 地相의 운세가 너무도 크게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차제에 부언하고 싶은 내용이 있다면, 풍수지리(지상학)는 천지이치(天地理致)를 깨달은 사람에게 자연스럽게 열리는 신안(神眼)이나 도안(道眼)의 경지를 가야 비로서 논할 수 있는데, 하늘의 창조목적(創造目的)이 담겨 있는 地相을 학식위주의 지관들이 논하다 보니 地相의 진의를 크게 왜곡시키고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