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전 대통령 글 가족사진

2009. 6. 22. 00:35고증·참역사연구

박정희 전 대통령 글 가족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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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정 희 | 2007/01/13 (토) 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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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 2007] 대선후보의 가족|박근혜
[주간조선 2007-01-02 11:32]    

첫 조카에 사랑 듬뿍… 남동생 부부 종종 만나
여동생은 육영재단 운영, 김종필씨는 사촌 형부… 매년 8월, 10월 모여 현충원 찾아
박근혜(55) 전 한나라당 대표는 알려진 것처럼 결혼을 하지 않았다. 박정희·육영수의 장녀인 그는 여동생(박근영·53)과 남동생(박지만·49)이 있다. 박근혜 의원은 6·25 전쟁 중인 1952년 피란지 대구에서 태어났다. 서울 장충초등학교와 성심여중고를 나온 뒤 서강대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했다.

박근혜 의원의 가족은 매년 8월 15일과 10월 26일 서울 동작구 국립현충원에서 모인다. 8월 15일은 박근혜 의원의 어머니인 육영수 여사의 기일(忌日)이고, 10월 26일은 아버지인 박정희 대통령의 기일이기 때문이다. 지난해 8월 15일 육영수 여사 32주기에는 박근혜 의원, 박근영 육영재단 이사장, 박지만·서향희 부부가 참석했다. 같은 해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27주기에는 박근혜 의원, 박지만·서향희 부부가 추도했다.


5·6공화국 동안 박 대통령 유가족은 칩거와 은둔의 시간을 보낸다. 박근혜는 1993년 한국문화재단 이사장, 1994년 정수장학회 이사장직을 맡는 것 외에는 대외활동을 하지 않았다. 박근혜는 이 시기에 글쓰기에 전념했고 몇 권의 산문집을 출간했다.

15대 대통령 선거가 막바지에 이르던 1997년 12월, 박근혜는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를 돕기 위해 지원 유세에 나섰다. 사실상 정치 데뷔였다. 1998년 보궐선거를 통해 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이후 16·17대 의원에 연거푸 당선되었다. 한나라당 대표로 17대 총선을 지휘했고, 2년 임기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2006년 지방선거 당시 서울시장후보 지원유세장에서 테러를 당했을 때 사람들은 비운의 가족사를 떠올렸다.

여동생 박근영 이사장은 1954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경기여고와 서울대 음대를 나와 1982년 풍산금속 창업주의 아들 유청씨와 결혼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혼했다. 슬하에 자녀는 없다. 그는 1990년부터 서울 광진구 능동에 있는 육영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다. 또 이와 함께 1992년부터 어린이교통안전협회 총재도 겸하고 있다. 한나라당 당적을 갖고 있으며 한때 박근혜 의원과 불화설이 나돌기도 했다.


박정희가(家)의 유일한 아들인 박지만씨(현 EG회장). 1958년생으로 중앙고등학교와 육사를 나왔다. 그는 부모를 비명에 보낸 충격을 이기지 못해 20~30대 방황의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1989년부터 박태준 포철 회장의 도움으로 포항제철 협력사인 삼양산업 경영에 참여했고 1996년부터 삼양산업 회장으로 있다. 삼양산업은 2000년 이지(EG)로 상호를 바꿨고 현재 코스닥에 상장되어 있다.

박지만 회장은 2004년 16살 연하인 서향희 변호사와 결혼했다. 서향희 변호사는 1974년 전북 익산에서 태어났지만 학교는 부산에서 다녔다. 부산 중앙여고를 나와 1998년 고려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1999년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현재 새빛법률사무소 변호사로 있다. 박지만·서향희 부부는 2005년 아들(세현)을 얻었다. 박정희가의 첫 손주다. 주위에선 박지만 회장이 가정을 꾸리고 나서 새사람으로 거듭났다고 말한다.

조카(박세현)가 태어난 이후 고모(박근혜)의 얼굴이 훨씬 밝아졌다고 주변은 전하고 있다. 지난해 5월 5일 어린이날을 앞두고 박근혜 의원은 조카에게 선물한 옷과 장난감을 직접 고르며 어린아이처럼 기뻐하기도 했다.

박 의원이 지난해 지방선거 당시 피습으로 신촌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수술을 마치고 “조카가 보고 싶다”는 말을 했다. 실제로 박지만ㆍ서향희 부부는 아들을 안고 세브란스 병실을 찾은 모습이 목격되기도 했다. 박정희가의 첫 손주인 세현에 대한 박 의원의 사랑이 애틋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박 의원은 일요일 조카가 자택(서울 삼성동)으로 놀러오면 직접 피아노를 치면서 자장가를 부르기도 한다.

박 의원은 조카에게 ‘박짠’이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세상에 ‘짠’ 하고 나타났다는 뜻이다. 지난해 부친 생가(경북 선산)를 방문했을 때 박 의원은 “조카가 고모를 알아보고 방실방실 웃는 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이 녹아내리는 기분이 든다”고 말했다.

국무총리와 자민련 총재를 지낸 원로 정치가 김종필씨는 박근혜 의원의 사촌 형부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둘째 형 박상희의 딸(영옥)이 김종필씨의 부인이다. 대구폭동 당시 숨진 박상희를 동생 박정희는 존경하고 따랐다고 한다.
대선주자 박근혜 의원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결혼해 아이를 낳아본 일도 없는 사람이 어떻게 국가경영을 하겠느냐”고 말한다. 이런 비판이 나올 때마다 박 의원은 이렇게 반박한다.

“저는 부모님도 없고 이제 더 이상 잃을 것도, 얻을 것도 없는 사람입니다. 나는 대한민국과 결혼했습니다. 자식이 없으니 사심도 있을 수 없습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대한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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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정 희 | 2006/08/02 (수)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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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소득 1만 달러를  돌파하는 데 일본은 100년이 걸렸고, 미국은 180년이 걸렸으며, 영국은 200년이 걸렸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1961년부터 1997년까지 단 36년 만에 국민소득 1만달러를 달성했다. 이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국가 중 최단시간이며 최고의 속도였다. 바로 그 1만 달러 소득을 달성하는데 가장 큰 주역을 한 사람이 박정희 전 대통령이다.
 
신화를 만든 한국경제의 건축가! - 뉴욕타임스
 
건국 이후 국부 형성에 가장 큰 기여를 한 사람! - 국민일보 창간기념 여론조사
 
대한민국을 세계에 알린 인물 1위 - KBS 광복 60주년 여론조사
 
역대 정권 중 발전에 대한 인상 가장 강해 -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 리서치
 
 
 
솔직히 말에 박정의에대해 나도 그리 좋게 보지않지만 이건사실이다.
 
먹기 어렵던시절 지금으로보자면 당신들 할아버지나 아버지한테 물어보시길
 
저는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다 시골에 사시는데 박정희에 대해 질문을 해?는데
 
독재한다고 뭐 서울에서  데모하던 학생들 다때려 주기고 싶엇다고 한다 오히려.
 
박정희는그래도 왜냐 먹고 살기는 해?다고..  
 
 
 
 
왜하필 박정희인가
 
박정희가 누구인가 무려 20년이란 긴 세월동안 이땅을 통치하던 독재자가 아니던가.
 
떠올리기도 싫은 우리 역사의 암흑기  내가보기엔 박정희는 적어도 전노일당(전두환
 
노태우) 이놈들보단 낳다 ..
 
그는 무언가가 다른 독재자였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독재자들은 축재에 열을 올린다. 루마니아의 대통령 아무개가 그랬고 필리핀의 아무개가 그랬다. 대중들을 현혹해서 엉뚱한 길로 인도한다. 독일의 히틀러처럼.
그러나 박정희는 어떠햇던가
 
그가 부하에 의해 사살될때 오랫동안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이 하나있었다.
 
너덜너덜 다 떨어져서 원래의 색을 짐작할수 없을 지경의 가죽벨트... 도저히 한나라의 대통령이 매고 있을 만한 것이 못되었다. 독재자가 죽으면 뒷말이 무성한 법이다.
없는 말도 만들어진다. 그런데 박정희의 경우 부하들이 챙기는 것은(돈) 눈감아주고  그자신이 뭔가 챙겼다는  소리는 들린적이없다. 그는 적어도 자신을 위해 독재한것은 아니었다. 잘살아보자고 외치며 발버둥치다가 비 참하게 삶을 마감한것이다.나는 느닷없이 박정희를 두둔하려고 이글을 쓰는것이 아니다  역사가들의 비판에 대해 반론을 펼 생각도 전혀 없다.그러나 욕할건 욕하더라도 잘한 덕목이잇다면 평가해줄만큼 우리 사회가 성숙해졌다고 나는 믿고 지금입 바로 그때라고 보고있다.
 
 
...
"이 세대 이 나라 국민으로 태어나서 평생의 소원이 있다면 우리 세대에 우리의 조국을 근대화해서 선진 열강과 같이 잘사는 나라를 한번 만들어 보는 것이다.
 
-1964년 8월3일 국방대학원 졸업식 유시에서.
 
...
"개발도상국에서의 정치 초점은 경제 건설이며, 민주주의도 경제 건설의 토양위에서만 자랄 수 있다."
 
-1968년 1월1일 국민에게 보내는 신년 메세지 중에서.
 
내생각은 이렇다 민주주의는 경제가 성장해야지 가능하다 이건 누구나 맞는말이다. 영국 미국 이런나라들도 못살때는 독재아니엿던가? 잘살고나니 국민들의 발언권이 높아지고 거기에서 민주주의가 자랄수잇는거아닌가?
 
 
 
 
 
 
 
 
 
ps.박정희 대통령은 국내에서의 엇갈린 평가와는 달리 외국에서는 탁월한 지도자로 평가받고 있다, 박정희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는 그의 한국형 경제 모델에 관한것이다. 1960년대초 1인당 국민소득이 82달러에 불과한 세계 최빈국의 한국을 불과 20년도 안 되는 기간안에 중진국으로 끌어올렸기 때문이다.
오늘날 중국도 박정희의 경제 개발 모델을 타산지석으로 삼아 경제발전에 힘쓰고 있다. 특히 중국을 개방하기로 한 덩샤오핑은 박정희의 경제 개발모델을 열심히 연구했던 중국의 지도자였다.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 총리 또한 박정희 경제 모델을 연구하여 말레이시아를 중진국 대열로 끌어올렸다. 이른바 마하티르의 동방정책(Look East)은 박정희의 경제 모델을 그대로 본뜻 것이었다. 마하티르는 박정희의 경제모델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스스로 고백한 바 있다.
오늘날 말레이시아는 1인당 국민소득 5,000달러로 중진국 대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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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대통령은 매우 강한 지도자였으며 대기업을 일으켜 국부(國部)를 증진시킨 훌륭한지도자이다   
                                               -말레이시아 전 총리 마하티르
 
에 올랐으며 2020년까지 1만5,000달러 소득의 선진국가를 만든다는 청사진을 가지고 있다.
 
싱가포르의 리콴유 총리도 박정희 모델을 연구한 지도자였다. 오늘날 싱가포르는 박정희 경제 모델을 연구, 정책을 실시한 결과 1인당 국민소득 2만달러의 아시아 허브국가로 떠올랐다.
무샤라프 파키스탄 대통령도 박정희 경제 모델을 탐구하여 후진국인 파키스탄을 중진국 대열에 올려놓으려고 노력하고 있는 중이다. 1960년대 초반의 한국이 오늘날의 파키스탄과 매우 비슷한 겨에 환경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아시아의 국가 중에서 한국은 가장 성공한 경제 모델을 가지고 있는 나라임에 틀림없다. 한때 우리보다 잘살았던 필리핀, 태국 등 의 국가는 근대화 정책의 추진에 실패함으로써 한국보다 훨씬 가난한 나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제 한국은 과거 우리보다 잘살았던 대만이나 싱가폴 등에 비해 국민총생산 규모가 월등히 앞선 국가 가
 
....
오직 일에만 집중하고 평가는 훗날의 역사에 맡겼던 지도자.
                                             -싱가포르 전 총리 리관유
 
되었다. 그들 국가에 비해서 한국은 무역 교역이 훨씬 앞서 있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이 1만 달러 소득을 돌파하고 구미 선진국과 철강,기계,조선,자동차,전자,반도체,정보통신,석유화학 등의 분야에서 당당히 어깨를 겨눌수 있는 것은 1970년대 박정희가 추진했던 중화학공업 위주의 정책을 펴지 않았다면 한국은 필리핀이나 태국같은 후진국 신세를 면치 못했을 것이다.
박정희는 그의 재임 기간 18년 동안 한국 경제를 회생시킨 역대 최고의 지도자였다. 개발독재를 한 것 때문에 상당한 비판을 받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경제 발전에 대한 업적은 과소평가될수없다. 그는 24시간 수출만을 생각하던 대통령이었으며, 부강한 나라를 만들기 위한 정책 구상에 여념이 없었던 대통령이었다.
1979년 10월 26일, 피투성이가 된 채 병원에 갔을때 의사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가 워낙 싸구려 손목시계를 차고 있었기 때문에 대통령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한국 경제를 급신장시켰으나 그 자신은 죽는 순간까지 검소했다. 자식을 위해서는 좋은밭을 사지않는다는 자신의 말처럼 박정희는 훗날 자식들에게 어떠한 유산도 물려주지 않았다. 그런 면에서 박정희는 사심이 없는 청렴한 대통령이어다.
 
....
어렵던 시절, 한국을 이끌어 고도로 공업화된 민주국가로 변화시킨 역사적 역할을 담당한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해 깊은 존경심을 가지고 있다. 그는 후임 대통령들이 본보기로 삼을 만한 유산을 남긴 한국에서 가장 성공적이었던 지도자들중 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무샤라프 파키스탄 대통령
 
2005년 지난 100년동안 프랑스를 빛낸 100명의 인물중 누가 뽑혓는지 아는가?
독재자 드골이다.    (드골평전을 읽어봐라 대단한사람이다)
 
독재자라고 다나쁜건아니다.. 우리나라 국민들 수준이 이거 밖에 안된다는것이냐?
박정희가 돈빼돌렷다는 증거를 대봐라.. 내가그럼 믿어주마.
 
(출처 : '박정희대통령 평가 (다읽고 써주시길 스크롤압박 잇음)' - 네이버 지식iN)
 
 
박정희 전 대통령의 글과 가족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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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정 희 | 2006/07/16 (일) 2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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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춘삼월 소묘 -1951년 4월 25일

벚꽂은 지고 갈매기 너울너울
거울같은 호수에 나룻배 하나
경포대 난간에 기대인 나와 영수
노송은 정정 정자는 우뚝
복숭아꽂 수를 놓아 그림이고야
여기가 경포대냐 고인도 찾더라니
거리가 동해냐 여기가 경포냐
백사장 푸른 솔밭 갈매기 날으도다.
춘삼월 긴긴날에 때가는 줄 모르도다.
바람은 솔솔 호수는 잔잔 저건너
봄사장에 갈매기떼 날아가네
우리도 노를저어 누벼 볼까나


영수의 잠자는 모습을 바라보고 -1952년 7월 2일 밤

옥과도 같이 금과도 같이
아무리 혼탁한 세속에 젖을지언정
길이 빛나고 아름다와라.
착하고 어질고 위대한 그대의
여성다운 인격에
흡수되고 동화되고 정화되어
한 개 사나이의 개성으로
세련하고 완성하리.

행복에 도취한 이 한밤의 찰나가
무한한 그대의 인력으로서
인생코스가 되어 주오.
그대 편안히 잠자는 모습을 보고
이 밤이 다 가도록 새날이 오도록
나는 그대 옆에서 그대를 보고 앉아
행복한 이 시간을 영원히 가질 수
있도록 기도하고 있다.


저도 바닷가에 혼자 앉아서 ―1976년 8월 5일

똑딱배가 팔월의 바다를
미끄러듯 소리내며 지나간다
저멀리 수평선에 휜구름이 뭉개뭉개
불현 듯 미소짓는 그의 얼굴이
저 구름속에서 완연하게 떠오른다

나는 그곳으로 달려간다
그이가 있는 곳에는 미치지 못한다 순간
그의 모습은 사라지고 보이지 않는다
뛰어가던 걸음을 멈추고

망연이 수평선을 바라본다
수평선 위에는 또다시 일군의
꽃구름이 솟아오르기 시작한다

흰 치마저고리 옷고름 나부끼면서
그의 모습은 저 구름속으로 사라져 간다
느티나무 가지에서 매미소리 요란하다
푸른 바다 위에 갈매기 몇 마리가
훨훨 저건너 섬쪽으로 날아간다

비몽(比夢)? 사몽(似夢)?
수백년 묵은 팽나무 그늘 아래
시원한 바닷바람이 소리없이 스쳐간다
흰 치마저고리 나부끼면서
구름속으로 사라져 간 그대


한송이 목련이 봄바람에 지듯이 ―1974년 8월 20일

상가(喪家)에는 무거운 침묵속에
씨롱 씨롱 씨롱 매미 소리만이
가신 님을 그리워하는 듯 팔월의 태양아래
붉게 물들인 백일홍이 마음의 상처를 달래주는 듯
한 송이 흰 목련이 봄바람에 지듯이
아내만 혼자가고 나만 홀로 남았으니
단장의 이 슬픔을 어디다 호소하리

비오는 저도의 오후 ―1976년 8월 6일

비가 내린다
그다지도 기다리던 단비가
바람도 거칠어졌다
매미소리도 멎어지고
청개구리소리 요란하다
검푸른 저 바다에는
고깃배들이 귀로를 재촉하고
갈매기들도 제집을 찾아 날아간다

객사 창가에 홀로 앉아
저멀리 섬들을 바라보며
음반을 흘러나오는 옛노래를 들으면서
지난날의 추억을 더듬으며 명상속에
지난날의 그 무엇을 찾으려고
끝없이 정처없이 비오는 저바다 저하늘을
언제까지나 헤매어 보았도다


잊어버리려고 다짐했건만 ―1974년 9월 4일(수)

이제는 슬퍼하지 않겠다고
몇번이나 다짐했건만
문득 떠오르는 당신의 영상
그 우아한 모습 그 다정한 목소리
그 온화한 미소 백목련처럼 청아한 기품
이제는 잊어버리려고 다짐했건만
잊어버리려고 다짐했건만
잊어버리려고
잊혀지지 않는 당신의 모습
당신의 그림자
당신의 손때
당신의 체취
당신의 앉았던 의자
당신이 만지던 물건
당신이 입던 의복
당신이 신던 신발
당신이 걸어오는 발자국 소리

"이거 보세요" "어디계세요"
평생을 두고 나에게
"여보" 한번 부르지 못하던
결혼하던 그날부터 이십사년간
하루같이 정숙하고도 상냥한 아내로서
간직하여온 현모양처의 덕을 어찌 잊으리.
어찌 잊을수가 있으리.


우주의 저 멀리 돌아오지 않는 육여사 ―1974년 11월 1일

한국의 밤은 깊어만 가고
초생달 밤하늘에 은빛의 별
슬픔을 안겨준 국민의 벗이여
꽃같이 아름답고 우아한 마음
우주의 저멀리 돌아오지 않는 육여사

한국의 바다에 해가 저물고
산 하늘의 새 날아가도다
세월은 유사같이 행복은 사라지고
꽃같이 아름답고 우아한 마음
우주의 저멀리 돌아오지 않는 육여사
당신이 그리우면 ―1974년 9월 30일


당신이 이곳에 와서 고이 잠든지 41일째
어머니도 불편하신 몸을 무릅쓰고 같이 오셨는데
어찌 왔느냐 하는 말 한마디 없오
잘 있었느냐는 인사 한마디 없오 아니야
당신도 무척 반가워서 인사를 했겠지
다만 우리가 당신의
그 목소리를 듣지 못했을 뿐이야

나는 당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
내 귀에 생생히 들리는 것 같애
당신도 잘 있었오
홀로 얼마나 외로왔겠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당신이 옆에 있다 믿고 있어요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당신이 그리우면
언제나 또 찾아 오겠오
고이 잠드오 또 찾아오고
또 찾아 올테니
그럼 안녕


추억의 흰 목련 ―遺芳千秋 1974년 8월 31일 밤

하늘도 울고 땅도 울고
산천초목도 슬퍼하던 날
당신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보는
겨레의 물결이 온 장안을 뒤덮고
전국 방방곡곡에 모여서 빌었다오
가신 님 막을 길 없으니
부디 부디 잘 가오 편안히 가시오

영생극락하시어
그토록 사랑하시던
이 겨레를 지켜주소서
불행한 자에게는 용기를 주고
슬픈 자에게는 희망을 주고
가난한 자에는 사랑을 베풀고
구석구석 다니며 보살피더니

이제 마지막 떠나니
이들 불우한 사람들은
그 따스한 손길을
어디서 찾아 보리
그 누구에게
극락천상에서도
우리를 잊지 말고
길이길이 보살펴 주오
우아하고 소담스러운 한 송이
흰 목련이 말없이
소리없이 지고 가 버리니 꽃은 져도 향기만은
남아 있도다. ―

당신이 먼 길을 떠나던 날
청와대 뜰에 붉게 피었던 백일홍과
숲속의 요란스러운 매미소리는
주인 잃은 슬픔을 애닯아하는 듯

다소곳이 흐느끼고 메아리쳤는데
이제 벌써 당신이 가고 한달
아침 이슬에 젖은 백일홍은
아직도 눈물을 거두지 못하고 있는데

매미소리는 이제 지친 듯
북악산 골짜기로 사라져가고
가을빛이 서서히 뜰에 찾아 드니
세월이 빠름을 새삼 느끼게 되노라
여름이 가면 가을이 찾아 오고
가을이 가면 또 겨울이 찾아 오겠지만
당신은 언제 또 다시 돌아온다는

기약도 없이 한번 가면
다시 못오는 불귀의 객이 되었으니
아 이것이 천정(天定)의 섭리란 말인가
아 그대여, 어느때 어느 곳에서 다시 만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