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9. 3. 18:53ㆍ고증·참역사연구
일본 땅에 살아 있는 단군신앙
'모모타로우' 마쓰리는 단군신앙의 원형
고대 일본 땅의 지배자는 단군조선을 떠난 정복자이자 보트피플이었다. 다음에 고대 일본 땅의 지배자는 삼한을 떠난 정복자이자 보트 피플이었다. 이들이 먼저 일본 땅에 정착하였고, 이어서 삼국을 떠난 정복자들이 그 뒤를 이어 일본 땅에 정착하였다.
지금 일본의 주류를 이루는 인종은 이들의 후예들이라고 볼 수 있다. 한반도가 정치적 군사적 국가적 존망의 격변기에 처해 있을 때 일본 땅이 이들의 복주머니가 된 것이다.
일본의 천왕이 가락국의 후예라는 설과 백제의 후예라고 하는 두 가지 유력한 설이 제기 되고 있는 것만을 보아도 일본 땅이 중원과 한반도에 살았던 동이계 유민들의 복주머니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이 조상의 나라 즉 한국과 배달나라와 단군조선이 있었던 중원 땅과 한반도를 떠나 갈 때 몸에 지니고 간 징표가 옥(玉)과 칼(劍)과 거울(鏡)이었다. 이를 동이족을 다스리던 국신인 구황대주(九皇大主)가 물려준 보물인 삼신기(三神器)라고 하였다.
옥은 신을 상징한다. 9900년 전에 한국을 세운 구황족의 신인 구황대주를 뜻한다.
검은 4300년 전에 단군조선을 세운 단군왕검이 물려준 칼이라는 뜻이다. 검劍자에 그 의미가 들어 있다. 劍자에 들어 있는 僉이 단군왕검檀君王儉을 의미하는 눈자이기 때문에 그렇게 볼 수 있는 것이다. 검은 처음 내린 칼이라는 뜻이다.
거울은 천부인을 새긴 신체이다. 한반도에서는 구월산 삼성사를 지켜 온 황해도 무당들이 명두라는 이름으로 지켜 오던 유물이다. 14000년 전에 마고가 마고지나를 폐쇄하면서 후손에게 물려준 것을 단군조선에서 국가보물로 전수해 오다가 제 47세 고열가단군 때 고열가 단군이 구월산에 은거하면서 삼성사를 짓고 한인 항웅 단군왕검 삼조에세 제사지내면서 물려 온 것이다.
이 신기를 가진 사람들이 나라(奈浪)에 정착하였다. '나라'란 "바다의 파도를 헤치고 상륙한 사람들의 나라"라는 뜻이다. 이어서 오사카(大阪 河內)에서 백제인 닌토구(仁德)천왕이 다스리는 나라가 시작되었으며, 교우도(京都)에서 (桓武) 천왕의 통치가 대를 이어 16세기까지 계속되었다. 오사카는 대구(大丘, 큰 비탈진 언덕)란 뜻이다. 대구란 청구(靑丘, 푸른 언덕)처럼 나라를 의미한다. 칸무천왕의 칸(桓)자도 한인(桓因), 한웅(桓雄), 한국(桓國)과 같은 의미로 쓴 것이다.
칸무천왕의 뿌리가 한인 한웅 한국에 있다고 선포한 것과 다름이 없다. 조선의 정복시대가 끝나고 일본화 된 때는 카마쿠라(鎌倉) 무사정권 이후라고 일본학자들은 말하고 있다. 우리는 서일본(西日本) 오카마마(岡山, 이 또한 나라를 의미한다)현에 있었던 기비국(吉備國)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기비국에서 전승되는 '모모타로우(桃太郞) 신화'가 단군시대와 관련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기비국에는 '아사히가와(旭川)'라는 강이 흐른다. '아사히'는 '아침조(朝)'자와 같은 뜻이다. 아침에 떠오르는 해를 뜻한다. '아사히'가 조선을 의미한다고 본다. 조선을 달리 '아사달'이라고 하였는데, '아사히'와 '아사달'은 같은 뜻이다. '가와'는 우리 말 그대로 '강'이 변음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아사히가와'는 '아사달에서 흐르는 강'이 되는 것이다.
신화에 따르면, 아사달에서 흐르는 강물에 복숭아 하나가 떠내려 온다. 이 부분도 단군시대의 신선사상을 그대로 나타낸 것으로 볼 수 있다. 신선이 인간세계에 다시 태어나기 위하여 신선도(神仙桃)에 실려서 강물을 따라 인간의 세계로 환생하는 것이다. 복숭아가 두 쪽으로 갈라지고 검을 찬 아이가 나온다.
이 부분도 그가 단군왕검의 적자임을 검(劍)으로 나타내 보이고 있다. 검은 단군왕검이 전수한 삼신기 중의 하나이다. 그는 청년으로 장성하여 개와 원숭이와 꿩을 데리고 도깨비 섬으로 도깨비를 정벌하러 떠난다.
개와 원숭이와 꿩은 그를 따르는 부족들을 상징하는 인종 아이콘이다. 개는 단군왕검 시대의 부족이었던 구가(狗加)의 한 분파로 보이고, 원숭이는 새로이 만든 한 종족으로 보이고, 꿩은 학가(鶴加)나 응가(鷹加)나 노가(鷺加)의 한 분파로 보인다.
이들이 도깨비를 정벌하러 떠날 때 '모모타로우'는 '기비당고(吉備團子, 경단과 같은 종류의 떡)를 몸에 지닌다. 이 대목도 의미심장하다.
떡이 단군왕검이 선포한 덕교(德敎)를 상징하는 때문이다. 떡은 제사나 차례 상에 올리고, 떡국을 끓여 나누어 먹는다. 이들이 다 덕을 숭상하고 덕을 나누자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떡국에는 단군조선이 덕국(德國)임을 나타내는 의미가 있다.
문자학에서는 단(團)자나 단(檀)자를 같은 뜻으로 본다. 이들 문자가 다 제사와 관련이 있다고 보기도 하지만, 최초로 만들어진 단자에서 계속해서 새로운 의미를 지닌 문자가 나오기 때문에 그렇게 보는 것이다.
자(子)는 본 신화에서 단군왕검의 자손으로 볼 수 있는 문자이다. 기비당고는 오까야마 지방의 명물에 속한다. 축제는 매년 4월 15일에서 16일 사이에 연다. 개막행사에 일본의 각 지방과 외국에서 온 축제의 여왕을 선두로 카 퍼레이드를 벌인다. 길 양쪽에는 후지야마(富山)현에서 보낸 튜립 꽃 12만 송이를 장식하여 축제 무드를 고조시킨다.
오후 7시 50분께 아사히가와에서 수상 이벤트로 배를 띄운다. 두 번째 날은 아침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모모타로우' 대 행렬이 거리를 메운다. 이 날은 1년에 한 번 보행자 천국을 이룬다. 이 축제에 오카야마현에 속한 11개의 시와 읍 면 등이 모두 참가하는데, 역대 성주들의 유물과 개인이 소지하고 있던 골동품 등을 진열하고 판매한다.
'모찌(떡)'와 '가미(검)'를 숭상하는 일본인의 집단무의식의 근원은 "단군숭배"
일본 땅에 남아 있는 단군조선의 국교인 덕교의 흔적
일본에서 단군왕검이 선포한 덕교(德敎)의 흔적으로 남아 있는 것이 모찌(もち, 떡)와 가미(儉, 神)라는 어휘이다. 일본은 떡을 종교적인 경지로 끌어 올려 숭상한다. 이는 떡을 제사와 차례에 올린 덕교의 영향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가미'라는 말도 단군왕검을 의미하는 검(儉)이라는 문자의 변형으로 볼 수 있으므로 단군왕검을 숭배한다는 의미가 된다.
덕교라는 말을 처음 쓰기 시작한 때는 9900년 전에 한인천제가 풍이족을 이끌고 한국을 세웠을 때이다. 이때 풍이족이 지켜키고 실천해야 할 국가적 이데올로기를 풍류風流라고 하였다. 풍류를 다른 말로 덕을 가르친다고 하여 덕교德敎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때는 삼신교를 믿었던 때이라 삼신교의 한 분파로 머물러 있었다. 덕교를 국가적 이데올로기로 부활시킨 분은 단군왕검이었다. 단군왕검은 이를 장려하기 위하여 덕과 떡을 동일시하였다.
일본에는 많은 신령이 존재하는데, 이를 팔백만신(八百萬神, 야오요로스노카미)이라고 한다. 이들 신 가운데 가장 존중하는 신이 천조대신(天照大神, 아마데라스오오미카미)이다. 이 신은 일본 황실의 조상신으로 알려졌는데, 아무도 함부로 모시지 못하게 했고, 나라를 다스리는 왕의 명이 있어야 제사를 올렸다.
일본 천황가에서 독점한다는 독점적인 지위를 누리는 신이 그 근원을 따져 보면 단군왕검임을 알 수 있다. 비록 여신으로 형상화 되어 있지만 이 여신의 실체는 단군왕검이다.
천조대신인 '아마데라스오오미카미'에서 단군왕검을 유추해 보기로 한다. '아마'는 우리 말 '이마'와 같은 말로 볼 수 있는 말이다. '카미'는 앞에서 보았듯이 역시 '검'으로 볼 수 있는 문자이다. 또한 천조(天照)는 단군의 단(檀)자와 같은 의미를 가진 문자이다. '천조'는 하늘에서 햇볕이 비친다는 뜻이요, '단'자는 해가 떠서 나무 위에 비친다는 뜻이다. 여기에서 박달나무라는 말이 나왔다. 이렇게 천조대신에서 단군왕검이 도출되는 것이다.
그러나 천조대신이 여성신이고 단군왕검이 신격화하여 남성신이 되었다는 점에서 우리를 혼란스럽게 한다. 어째서 이러한 일이 벌어질 수 있는가.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다.
우리는 듣게하고 일본은 보게 한다.
문물이 발달하면서 단군왕검의 기능이 세분화 하였다. 우리 굿 대감거리에 이 부분이 나타나 있다. 원래 대감(大監)은 단군왕검이 왕검이 되기 전에 가지고 있던 벼슬이었다. 그는 웅심국의 웅녀와 결혼하여 비왕으로 있었고, 단국의 태자로도 있었다. 그래서 그가 가진 권력과 기능이 막강하여 무려 아흔 아홉 가지나 되었다. 상고시대국가의 왕들은 해가 뜨고 지는 위치와 계절의 시기들을 알아내고, 농사짓는 법을 가르쳐야 하였다. 그러므로 왕이 백성에게 가르치쳐야 할 것은 민생과 관련이 되는 것들이었다.
단군왕검이 가진 온갖 능력이 모두 대감에게 있다. 대감거리에서 무당이 선거리를 하며이 부분을 구연(口演)한다.
그러나 일본은 우리와 다르다. 축제날 온갖 것을 다 '하꼬'에 실어 이동한다. 우리는 입으로 말을 하여 들려주고, 일본은 형상으로 만들어 눈으로 보게 하는 것이다.
제관은 단군왕검으로부터 많은 것을 받아내야 하는 임무를 띄고 있다. 그러므로 단군왕검에게서 나오는 것들을 하나하나 실어내는 '하꼬'의 숫자가 늘어난다. 한 마을이 '하꼬' 하나를 만든다고 해도 아흔 아홉 개의 마을에서 아흔 아홉 개의 '하꼬'를 만들 수 있다.
떡을 지고 가는 노인
흰 눈이 펑펑 쏟아지는 새벽, 어둠 속을 한 무리의 행렬이 지나가고 있다. 행렬의 중심엔 체구가 작달막한 호호백발 노인이 있다. 이 노인은 단군왕검이 군장(君長)이었던 시대의 단군왕검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노인은 거적으로 싼 짐을 지고 있다. 그 짐은 마을신인 단군왕검에게 바칠 떡이다. 노인은 앞을 보지 않고 뒷걸음치지도 않으며 다만 부릅뜬 눈에 온 정기를 다해 한 걸음 한 걸음 불안정한 걸음을 옮기고 있을 뿐이다. 마을신은 우리의 선조가 골짜기마다 성황당을 지어 모셨던 한웅천왕이나 단군왕검의 변형으로 볼 수 있다.
노인은 도우야(當家, 마을 제주 집)로 뽑힌다. 누구든지 제주가 되면, 마을의 오랜 전통에 따라 만사를 제쳐놓고 신을 모셔야 한다. 노인이 짊어진 떡은 마을신이 내려준 것으로, 제주 집 어른이 옮겨야만 한다. 제주가 아무리 나이를 많이 먹었어도 걸음을 걸을 수 있는 한 대리 운반이 허용되지 않는다. 이것이 이 마을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의 숙명이기도 하다. 제주는 생명력을 다해 그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마을에서 제주를 교체하는 날, 제주 집에서 신을 그 마을에 있는 약사당(藥師堂)으로 옮겨 간다.
약사당으로 변한 단군신당
약사당은 중생의 질병을 치료하고 재난을 방지하기 위하여 약사여래를 안치한 당집이다. 그러나 본래부터 약사여래를 당집에 모신 것은 아니었다. 불교가 들어오면서 도래인이 이미 모셔 온 한웅천왕이나 단군왕검이 약사여래에게 자리를 내어주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마을축제는 2월 8일에 행하는데, 그 전날(2월 7일) 떡을 만들고 벚꽃 조화를 만들어 장식한다. 2월 8일 오전 5시 30분 제주를 중심으로 한 행렬이 약사당으로 향한다. 떡과 조화를 봉양하고 나면 제주의 역할은 끝나는데, 마를 갈아 된장에 탄 국을 준비하고, 술과 안주를 장만해 마을 사람들을 대접한다. 사람들의 노고를 위로하고 무사히 역할을 끝냈다는 자축이다. 그리고 오후에는 약사당에 모여 의식을 거행하고 향연을 베푼다. 다음 제주를 선출하는 의식을 거행하면 이것으로 모든 행사를 끝마친다. 제주가 마을을 지키고 복되게 만든다고 해서 축제 속에 밀착된 생활감각, 경건한 기원, 소박한 즐거움, 등이 어우러져 축제무드를 고조시킨다.
일본 마을 축제의 유래
마을축제의 유래에 대하여, 일본의 학자들은 고대 일본의 죠우몬(繩文)시대를 기점으로 해서 야요이(彌生) 문화시대를 지나 고분시대로 들어오면서 형성되었다고 본다.
BC 1세기경에 한국을 떠난 삼한 사람에게 정복당한 북 큐우수 지방에서부터 벼농사 법이 전국적으로 퍼져나가면서 아울러 농사의 수호신에게 떡을 바치는 마을제사로 정착하였다고 한다.
원주민들은 키가 크고 늠름하게 생긴 삼한 출신의 정복자에게 지배를 받으며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라는 계급사회에 편입되고, 이들을 기반으로 한 마을단위의 국가가 형성되었다고 한다.
"이 시기에 일본 농민들은 온갖 사물에 신령이 있다고 믿고 곡물에게 제사를 지냈다. 대표적인 것이 농사를 풍요하게 해 달라고 밭에 지내는 밭 제사(田祭り)였다. 그 당시 벼농사는 지금처럼 논농사가 아니라 갈대밭을 개간해 벼를 심는 밭농사였으므로 밭의 신에게 제를 지내는 밭 제사가 생겨났다."고 마을축제의 근원에 대하여 정의한다.
"밭에서 자라는 벼나 다른 곡물 속에도 신령이 들어있고, 벼나 곡물 밖에 잘 자라게 하는 신령이 따로 있다고 믿어 집집마다 신단(신붕 神棚)을 차려 놓고 제를 올렸다. 곡물 밖에 존재하는 신을 모시는 마을제사가 축제로 발전하였다. 이것이 오늘날에는 질병을 퇴치하고 생업을 번창하도록 기원하는 범국가적인 일본의 축제가 되었다."고 한다.
단군왕검의 어머니 '웅녀'를 '미와산'에 모신 일본의천왕들
신라의 '연오랑'이 왜로 가지고 간 신바구니 '웅신리'
일본에서 고대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제1대 진무(神武)천왕 때부터 제9대 카이카(開化)천왕 때까지의 역사기록은 신빙성이 없다고 역사시대로 치지 않는다. 왕의 행적이며 치세 등 모든 것을 상세하게 기술한 제 10대 스진(崇神)천왕 때부터의 기록을 역사로 인정한다. 스진천왕은 신라 사람으로 신라를 떠나서 왜를 정복하였다.
그가 왜를 정복하였다는 점으로 보아서 신라 왕실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사람일 것으로 추측된다. 신라 왕실의 지원 없이 바다 건너 왜를 정벌한다는 일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스진천왕이 붕어하고 스진천왕의 제3왕자가 스이닌(垂仁)천왕으로 즉위한다.
일본 지방 사서인 <풍토기(風土記)>에 따르면, 스이닌 천왕 3년 3월에 신라 왕자 '아메노히보고(天日槍)'가 왕의 신표인 옥, 칼, 양날을 세운 창, 구리거울, 신바구니(神籬) 등 모두 7가지 신기(神器)를 가지고 일본에 건너온다. '아메노히보고'가 가지고 간 <신 바구니>란 굿을 할 때 넋을 담는 <넋 바구니>와 같은 것인데, 대나무를 쪼개서 만들어 고마(곰, 신, 북두칠성의 복합적인 의미)인 단군왕검의 어머니인 웅녀를 그 안에 신체로 모신 것이다. 이것을 히모로기(熊神籬)라고 하였다.
신라의 '연오랑'과 일본의 천일창'은 같은 인물
<일본서기>에서 '아메노히보고'는 '아메노호고(天之日矛)'로 나온다. 일본말 천지일(天之日)이나 천일(天日)이나 신라말 연오(延烏)는 '해'를 의미하는 같은 뜻의 말이다. <삼국유사>에서 '천일창'을 '연오랑(延烏郞)'이라고 한다. '연오랑'은 신라 제8대 아달라왕이 즉위한지 4년 되는 해(158년)에 왜로 건너간다. 그가 왜로 건너가서 이름이 바뀌었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이유로 '연오랑'과 '천일창'을 가은 사람으로 보는 것이다.
두 사람이 같은 사람인 점으로 보아서, 신라 왕조와 왜 왕조는 같은 왕조로 볼 수 있다. 일본 학자들은 이를 뒷받침하듯 스진천왕이 왜를 정복한 왕이라고 말한다. 신라는 '신라의 주신인 웅녀'를 모시고 왜 정벌에 나서 크게 성공하여 정복왕조를 건설한다. <고사기>와 <일본서기>를 보면, 스진천왕을 시작으로 그의 제 3자인 스이닌천왕, 케이코(景行)천황, 세이무(成務)천왕 등 4 명이 정복왕조를 건설한다.
신라 정복자들의 뒤를 이어서 백제왕가에서도 왜 정벌에 나서서 왜를 백제의 일부로 편입시킨다. 추우아이(仲哀)천왕, 오우진(應神)천왕, 닌토쿠(仁德)천왕이 이들인데, 이들은 <나라> 땅에서 <오사카> 땅으로 옮겨가서 본격적인 새 왕조를 출범시킨다. 정복자들 중에서 신라 출신의 스진천왕은 명망이 높아서 그가 붕어한 후에 일본 안에 있는 백제 성안에 묻힌다.
일본왕의 신표인 구리거울,연오랑이
신라에서 가지고 갔다.
스진천왕이 미와산에 단군왕검의 어머니 '웅녀'를 모시다
'히모로기'를 모신 미와산은 우리 말로 삼신산(三神山) 또는 삼각산(三角山)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동이의 시조인 마고삼신(麻姑三神)에서 나온 말로 볼 수 있다. 봉화 땅에는 태백산에서 소백산으로 갈라지는 곳에 태자산이 있다. 신라의 7대 이사금 5년인 무인 138년(단기 2471년)에 임금이 봉화에 순행하여 태백산에 올라 단군왕검에게 제를 지태백산은 단군왕검을 제사 지낸 산이다.
신라와 백제에서 왜로 건너가서 건설한 왕조는 매년 미와산에서 태백산을 향해 제사지냈다. 일본천왕가가 태자산을 제사의 방향으로 하여 제사지낸 것이 아닌가 한다. 신라와 백제에서 왜로 건너간 정복자들이 미와산에 웅녀를 모시고 제사를 지냈듯이 다른 곳에서도 제사를 지냈다. 신성(神聖)이 느껴지는 산과 강을 택하여 천지신명에게 제사를 지낸 것이다. 제사 지내는 곳이 여기저기 늘어나면서 신사가 하나 둘 들어서게 되었다. 신사를 지으면 거기에도 '히모로기'를 모시고, 신사에 이르는 신도(神道)도 함께 만들었다.
천평(天平) 5년(733)에 마감한 '출운국토기(出雲國土記)'에 보면, 그 당시 관사(官社)의 신지궁(神祗宮) 장부에 등재된 신사가 184개소, 등재되지 않은 신사가 215개소였다고 전한다. 기록에 따르면 출운국에는 향(鄕)에 61개소(里 179), 여호(余戶)에 4개소, 역사(驛家)에 6개소, 신호(神戶)에 7개소(里 12)가 있었다. '향'은 자연 부락으로 마을의 수준을 능가하는 규모가 큰 행정단위이다.
'리'는 향을 세분한 단위다. 1향의 1/3 규모로 자연부락에 가깝다. 또 '여호'와 '역가'를 각각 1리 정도의 규모로 본다면 출운국은 2리에 해당한다. 여기에서 '리'의 수와 '신사'의 수를 대비하면 1리에 약 둘 꼴로 신사가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관청에서 세운 '궁사'도 하나 꼴, 관청이 아닌 곳에 세운 것도 하나 꼴이었는데, 이는 당시의 생활상을 말해 주는 것이다. 이들 신사에는 '히모로기'가 모셔져 있었다.
'웅신리' 앞에 꿇어앉는 사람들
지금 우리에게 '웅신리'는 남아 있지 않다. 다만 무당이 쓰는 신대가 남아 있다. 언젠가 '웅신리'를 버린 것이다. 아마 불교가 이 땅에 들어오면서 버린 것이 아닌가 한다. 일본 사람들은 우리가 버린 '웅신리'를 지금도 보존해 오고 있다. 뿐만 아니라 '웅신리' 앞에 경건하게 꿇어앉거나 서서 행운과 복을 빈다. 우리에게서 잊혀진 단군조선의 조상이 되는 웅녀 앞에서 자신과 가족의 안위와 행복을 비는 것이다.
미와산에서는 1년에 2번 제례를 지내고 축제를 행한다. 이를 춘추이시제(春秋二時祭)라고 한다. 천왕가도 민가와 똑같이 제를 올리는데, 봄에는 풍년을 기원하고 가을에는 추수감사제로 올린다. 마을 사람들은 축제 때 노인들을 모셔다가 60대는 상좌에 앉히고 50대는 하단에 앉힌다. 두 줄로 나란히 앉게 한 다음 술과 안주 떡 등을 대접한다.
천왕즉위식 때 거행하는 '대상제' 그 기원을 우리 굿 '동지마지'와 '음복'에 두고 있어
'춘분마지굿'과 '동기마자굿'을 하는 '히라노 신사'
쿄토우 북부 히라노오미야모토쵸(平野宮本町)에는 히라노 신사(平野神社)라는 큰 사당이 있다. 히라노 신사는 백제인 칸무천왕이 8세기부터 그의 백제 조상을 모시고 궁중제사를 지내 온 유서 깊은 터전이다. 지금도 천왕가는 새 천왕 즉위식 때 이 곳에서 대상제(大嘗祭)라는 의식을 거행한다. 신대 로부터 현대에 이르는 동안 연면히 이어져 오는 이 의식은 천왕 즉위 직후 점을 쳐서 정해 진 유기국(悠紀國)과 주기국(主基國)의 벼, 즉 그 해에 첫 수확한 벼를 천왕이 왕조신(王朝 神)을 비롯해서 천조대신과 천신지기신(天神地祇神)에게 제를 지내고 나서 이들 조상신들과 함께 먹는 축제이다. 유기국과 주기국은 궁중에서 종자를 수확하는 농사를 짓는 어전(御田) 이 있는 땅이다.
기기신화(記紀神話)에 따르면, 천조대신이 보식신(保食神)으로부터 오곡의 종자를 받아 어 전에서 키워 수확한다. 수확한 것을 지상에 강림하여 천손(天孫)인 니니기존 즉 천조대신의 손자에게 주어 백성들이 먹고살게 한다. 천왕이 왕조신에게 감사하고 이렇게 함으로써 천왕 의 덕이 증가한다고 믿는다. 니니니존에게게 오곡의 종자를 넘겨주기 전에 먹어 보는 행사 가 대상제이다.
대상제를 거행하기 전에는 궁중에서 한신제(韓神祭 카라카미노 마쓰리)를 지낸다. 한신제는 2월 축일(丑日)에 올리는 춘일(春日祭)를 지낸 후와 11월 축일의 신상제를 거행하기 전에 지냈다. 한신제는 일본천왕의 조상인 백제왕들에게 올리는 제사이다. 춘일제는 우리의 <춘 분마지굿>으로 볼 수 있고, 신상제는 우리의 <동지마지굿>으로 볼 수 있다.
신라의 '연오랑'과 일본의 천일창'은 같은 인물
천왕가에서 행해지는 대상제는 국민들 사이에서는 신상제(新嘗祭)라는 이름의 농신제(農神 祭)로 거행된다. 11월 23일이 신상제가 거행되는 날이다. 동지 때 이 제례를 거행하는 것은 <동지마지>에 그 근원이 있고 본다. 한국을 세운 한인천제, 신시국을 세운 한웅천왕, 청구국을 세운 치우천왕, 배달나라를 인수한 단군왕검이 모두 나라를 세울 때 <동지마지굿>을 하였다. 일본 천왕가가 동지 때 대상제를 지낸다는 것은 일본 천왕가의 조상인 백제 왕가가 백제왕 즉위식 때 <동지마지굿>을 하였다는 결정적인 단서가 된다.
7세기 후반에 칸무천왕 시절부터 왕위 계승 때 <동지마지>를 친제(親祭)로 올리기 시작하 면서 이 농신제는 농신제에서 발전한 또 다른 성격의 대상제 또는 천조대상제(踐祚大嘗祭) 라고 불리기 시작하였다. 일본 학자는 이 제례를 일본의 왕위 계승권자가 '하늘의 왕자가 되 기 위한 의식'이자 '천왕으로서 자격완성을 위한 진혼(鎭魂)행사'라고 정의한다.
천왕즉위식을 하기전에 올리는 '해마지' '히노마코도'
즉위식을 하기 전에 신왕은 선왕이 사용하던 이불(衾)을 덮고 자는 의식을 행하여 선왕의 혼을 받아들인다.
이렇게 함으로써 선왕의 혼백이 신왕의 몸으로 들어온다고 믿는다. 육체에는 생사가 있지만 혼은 불변불멸(不變不滅)한다고 보는 생사관에서 비롯한다. 천왕의 <혼 마지>를 히노마코도(日の御子) 즉 <해(日)마지>로 본다. 우리 굿에서 행하는 <일월(日月)마지>와 같은 행사가 천왕가식 대로 행해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행사를 진상추금(眞床追衾)이라고도 하는데, 매년 되풀이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천왕의 위력이 강해진다고 보기 때문이다. 새로운 힘을 받은 천왕은 고어좌(高御座)에 올라가 백성 들에게 축사한다. <고어좌>는 일신(日神) 즉 천조대신이 있는 장소와 동일시한다.새해 원단(元旦)에 천왕이 고어좌에서 행하는 축사는 <하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진다. 대상제는 종교행사이다. 이 행사를 통하여 천왕의 혼이 선대와 후대 사이에 계승된다고 한다.
이 밖에도 대상제는 지방 성주의 천왕에 대한 속복의례(屬服儀禮)적인 성격도 가지고 있다. 대상제로 맺어진 천왕과 성주 사이가 성혼(聖婚)으로 맺어지기도 한다. 이 속복의례를 삼한 (三韓) 정복자들이 행했던 의식에서 기원한다고 보는 학자도 있다. 오랜 역사를 가진 이 제례는 백제인 정복자를 조상신으로 모신 일본에서만 행해지고 있는 전 세계에 유례가 없는 고유한 의식이다. 그러나 대상제를 일반인에게 공개하지 않아 신사에 모신 신들에게 올리는 제례가 백제왕에 게 올리는 제사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또한 히라노 신사가 고대로부터 백제 출 신 천왕가의 신사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거의 없는 형편이다.
'일본 신도神道'의 본질 신도의 키워드 '고천원高天原'
삼라만상에 신이 있어
인격신人格神에 익숙한 현대인은 신이라고 하면 인간의 모습을 한신을 연상한다. 그러나 일본에선 반드시 인간의 형상을 한 신만을 신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고대인이 '신이 계신 언덕(御坂)'을 노래할 때, 그 산비탈이나 길 그 자체를 신이라고 하였다. '신이 계신 언덕'은 우리 굿 산신거리에서 구연하는 그 산의 산신이 계신 곳이다. 우리 한반도의 중심 지역을 주장하는 산신은 '삼각산 산신'이 된다. 나무에 신이 계신 나무를 우 리가 박달나무로 보았듯이 일본에선 삼나무杉木를 신목으로 보았다.
신은 이렇게 일본인의 눈길이 가는 곳에 고르게 퍼져 있었다. 산이 신이었으며, 바다가 신이었으며, 어떤 경우엔 곶岬, 골짜기, 나무숲, 돌 그 자체가 신이었다. 또 자기가 사는 주거 공간에도, 앞마당 우물 에도 신이 있다고 믿어왔다. 한마디로 삼라만상森羅萬象이 신의 재현이라는 것이다. 일본 고유의 신앙인 신도神道는 이런 세계에서 태어났다. 신과 더불어 있는 것을 유신惟神 이라고 하는데, 생명체는 그 유신의 세계에서 신의 몸을 나누어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므로, 생명체의 하나인 사람은 '신의 자식', 생명은 '신의 분령分靈'이라고 생각한다.
칠석제 때 줄을 듸어 놓고 소원을 적은
종이를 매달고 안녕과 복을 기원한다.
'후베바코'에 모시고 다니는 묘견공주, 묘묘견공주는 가락국의 시조 김수로왕의 따님이다. 묘견 공주는 모시고 다니는 산모(야마하코)
모
사람은 지신의 은덕을 입고 태어나
사람은 그들이 사는 '지신地神(土地神, 産土神)'의 은덕을 입어 태어나 지신과 그 밖의 여러 신들과 당당히 만나 사계절의 혜택을 당당히 누린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지신이 인도하는 조령祖靈(祖上神)의 세계로 돌아간다고 했다. 조령이란 개성이란 있을 수 없고, 그것은 일종의 집합적인 신령의 모임이라는 것이다. 민중의 차원에서 볼 때 신들의 세계란 이처럼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고, 이 세상 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총체를 가리키고 있다. 이러한 세계에 천상신天上神들의 세계인 고 천원高天原이 있다고 한 것은 천왕이 국가를 지배하기 시작한 이후였다.
하늘에 고유한 주거가 있는 신은 고천원에서 키운 벼이삭을 후손에게 물려준다는 신화에 따라 그 나라의 신의 세계에 혁신을 가져왔다고 한다. 신의 세계가 탄생하는 데, 천상에는 천상을 다스리는 천진신天津神(아마스카미)이, 지상에는 지상을 다스리는 국진신國津神(쿠니 야스카미)이 탄생한다. 천왕의 왕권은 고천원 신인 천진신에서 나온다고 보고, 지상을 다스 리는 왕권을 행사한다. '신기神祇'의 '신神'은 고천원에 거주하는 천진신을 가리키고, '신기神 祇'의 '기祇'는 땅에 거주하는 국진신을 가리킨다. 여기에 태양이 뜨는 동쪽을 숭배하는 동쪽숭배 신앙이 추가된다.
태양이 뜨는 동쪽에는 '생 명의 원천'인 생명의 세계가 있고, 해가 지는 서쪽에는 '죽음의 세계'가 있다고 본다. 생과 사의 세계를 초월하여 머리 위에 고천원이라는 영원의 세계가 있고, 천상과 삼과 죽음의 세 계 사이에 중진국中津國 내지 대해大海 즉 바다의 세계가 있고, 바다 밑으로 황천국黃泉國 즉 근根의 나라인 저底의 나라가 있어, 신계가 3층 구조를 이루고 있다고 본다. 황천국은 天 孫族이 다스리는 나라라고 한다.
일본의 고대인들은 '신계'를 셋으로 나누어
일본의 고대인들이 신이 다스리는 곳을 천상과 지상과 황천의 세계로 나누고, 천상의 주인을 천진신, 지상의 주인을 국진신, 황천국의 주인은 천손족이다. 이렇게 신계를 천지황(天地黃의 삼계三界로 나눈 것은 우리의 신관을 그대로 옮긴 것으로 보아 진다. 우리는 우주의 주신을 태일太一즉 상제上帝 한 분으로 보고, 신계를 상계上界, 중계中界, 하계下界의 셋으로 나누고, 상계의 주신을 천일天一로 하고, 하계의 주신을 지일地一로 하 고, 중계의 주신을 태일로 하여, 상계와 하계의 주신들이 중계의 주신인 태일에 근원을 두게 하였다.
신을 삼신상제三神上帝로 본 것이다. 일본의 신관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삼신상제 신관의 모방이다. 이는 일본 신도의 뿌리가 우리에게 있고, 일본을 구성하는 민족이 우리로 부터 나왔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일본의 천상계의 신이 높은 나무에 강림한다는 신앙은 천상에서 천진신이 지상에 하강하는 것으로, 신인인 한웅천왕과 단군왕검이 신단수에 하강한다는 천인하강신앙에서 비롯한다. 따라서 일본의 천진신이 한웅천왕과 단군왕검의 변형임을 알 수 있다. 일본은 천왕을 신격화 하고자 하는 근거를 여기에서 찾는다.
일본의 속셈은?
이렇게 볼 때, 얼마 전에 일본의 모리요시三喜朗 총리가 '일본은 천황 중심의 신의 나라'라고 발언한 것은 의미가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일본의 신임 총리가 한 이 말에 나라 안팎이 발칵 뒤집어졌다. 우리가 잊을 만하면 튀어나오는 일본 각료들의 발언은 망언이 아니라 그들대로 하고 싶은 말을 하고자 하는 진실의 고백이다.그는 전 세계인을 상대로 말하지 않고 우리를 향하여 말했다. 그 말은 '우리 일본도 한웅천왕의 자손이고, 단군왕검의 자손이다. 고구려의 자손이고 백제의 자손이다. 당신들이 국조로 모시는 조상을 우리도 국조로 모시고 살아가고 있다.'는 뜻이다. 그들의 뿌리가 우리에게 있다는 고백인데, 우리가 발칵발칵 성을 낸다는 것은 우리 자신의 생각이 정립이 되어 있지 않다는 증거이다. 우리는 앞으로 시도 때도 없이 터져 나오는 '일본인의 진실의 고백'에 대하여 우리 나름대로 진지하게 대하는 자세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본다.
한국신을 일본 최고신으로 모시는 '기온마쓰리祇園祭'
한반도에서 건너간 '우두천왕'에게 지내는 제사
일본신궁에 모시는 '고신타이'
일본 각지에 있는 사당인 신사며 신궁에는 '고신타이(御神體 어신체)'를 모신다. 거울(鏡), 검(儉), 돌(石) 등이 그것인데, 이것들은 신을 상징하는 신체는 아니고, 신이 강림하여 깃들여 있는 신령(神靈)의 일부라고 믿는다. 거울은 이미 한웅천왕 시대에 풍백이 들고 다니던 천부인의 신표였고, 검은 운사가 허리에 차고서 한웅천왕을 호위하던 무기였다.
돌은 북진(北辰 북극성)과 칠요(七耀 북두칠성)가 지나가는 자리에 놓인 고인돌이었다. '고신타이'를 '미타마시로(御靈代 어령대)'라고도 하는데, 이 '시로(代)'는 신령이 거기에 묵고 있는 '요리시로(依代 의대)'로 역시 '신령이 머무는 신령한 것'이란 의미가 된다.
고대 일본사람은 신의 도움을 받으며 신과 함께 살기 위해서는 신의 강림을 비는 제사를 지내야 한다고 믿었다. 자연 그대로 방치된 거석(巨石)이나 신비스러운 상록수를 신이 강림하는 어좌소(御座所)나 의대(依代)로 정했다. 이러한 곳을 '신이 사는 산(칸나비)이나 숲(森 삼)'이라고 하며 숭배하였다. 돌을 어좌소로 정한 곳을 '이와쿠라(磐座 반좌)'라고 하고, 나무를 어좌소로 정한 곳을 '히모로기(神籠 신롱)라고 하였다. 봄, 가을 등 가장 중요한 절기에 이러한 곳에 어좌소를 설치하고 축제를 집행해 왔는데, 후에 신사나 신궁이 되었다. 명치시대 이전엔 일본의 촌(村)과 리(里)에는 촌과 리를 지키는 '진수(鎭守)의 신'이 있고, '진수의 야시로(社)'가 있었다. 명치시대에 '진수의 신'과 '진수의 야시로'를 통폐합하면서 제신(諸神)도 통합하였다. 그리하여 각지의 신사는 천왕가의 조상신인 천조대신(아마데라스오미카미)를 모시는 이세신궁(伊勢神宮) 밑으로 통일, 관리하게 되었다.
한국신을 모시는 소리 "왔소이! 왔소이!"
쿄토우에서는 7월 1일에서 한 달 동안 기온마쓰리(祇園祭)제로 보낸다.그래서 7월 한 달을 문월(文月), 또는 제월祭月이라고 한다. 7월 한 달 중에서 7월 17일에서 24일까지 야사카신사(八坂神社)에서 기온마쓰리를 한다. 기온사(祇園社)의 명칭은 서기 566년에 신라에 건립한 기원사(祇園寺)에 근원이 있다고 본다.
기온사는 메이지유신(1868년) 때 야사카신사로 이름이 바뀌었다. 불교를 배척한 메이지 정권이 신불습합(神佛習合)이라는 신과 부처의 동일체의 종교관을 깨고, 신만을 국가적으로 받들면서, 이른바 황국사상(皇國思想)이라는 국수주의적 종교관념을 도출해 내었다. 이때에 일본 안에서 한국적인 흔적을 지우는 작업을 병행하였다. 군국주의(軍國主義)가 태동하고, 정한론(征韓論)이 고개를 들었다.
기온마쓰리는 일본 전국에서 손꼽히는 마쓰리이다. 이 축제에서 신령을 모신 가마(神輿 미코시)를 수십 명의 혈기왕성한 가마꾼들이 메고 끌며 "왔소이! 왔소이!"하고 구령을 외치면서 큰 거리를 누벼댄다.
이들이 소리지르는 "왔소이!"는 다름 아닌 "한국에서 신이 오셨다"는 한국말이다.(홍윤기 문학박사) 거리에는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수십만의 구경꾼들로 성시를 이루는 가운데, '야마'라고 부르는 신령을 모신 큰 수레를 정해진 차례대로 힘차게 모는 가마꾼들의 행진이 이어진다.마쓰리에 등장하는 야마(山車 산차)와 호코( 모)는 오전 8시경에 나타나기 시작하여 모두 14 대가 기운차게 행진한다. 이중에서 호코는 6대이다. 야마 호코는 큰 나무바퀴 4 개가 달린 집체 같은 수레이다.
우두국 출신의 우두천왕을 모시는 기온사 마쓰리
야마호코에 모시는 신은 여러 신이 있으나, 주신은 한반도에서 건너온 우두천왕(牛頭天王)이라는 신이다. 이 신을 역사에서는 '스사노오노미코토(須佐之男命)이라고 부른다.스사노가 우두천왕이 되는 점으로 보아서, 쇠머리를 족표로 썼던 <소시머리> 부족의 일족이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단군세기에 보면, 3세 단군 가륵때인 무신 10년(BC2173) 두지주(斗只州)의 예읍(濊邑)이 반란을 일으켜 추장 소시머리를 베어 죽인 적이 있었다. 가륵단군 때 보다 오래 전의 일이었다. 그때부터 그 땅을 소시모리라고 하다가 가륵단군 때는 음이 바뀌어 우수국(牛首國)이라고 하였다. 소시머리의 후손에 협야노라는 자가 있었는데, 바다로 도망쳐 삼도(三道 일본)에 웅거하며 스스로 <천왕>이라 하였다. 스사노는 그가 우두천왕이라고 하였고, 협야노가 오늘의 일본인 삼도로 도망가서 스스로 <천왕>이라고 하였으니, 그가 스사노오노미코토일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일본 최고의 마스리인 기온마쓰리의 실체
기온마쓰리가 일본 마쓰리 중에서 가장 큰 제례가 되는 까닭은 기온사가 일본 마쓰리의 원류(原形)이 되기 때문이다.일본에 3대 마쓰리가 있는데, 쿄우토의 기온마쓰리를 비롯하여 오오사카의 텐만마쓰리(天滿祭)와 토우쿄우의 칸다마쓰리(神田祭)이다. 그러나, 오오사카의 텐만마쓰리나 토우쿄우의 칸다마쓰리의 기원사의 기원어령회(祇園御靈會)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므로 기온마츠리가 일본 마쓰리의 원형이 된다. 기온마쓰리는 한국신 우두천왕제로서 일본 마쓰리의 조종(祖宗)이 되고 있다.
쿄우토우의 기온사인 야사카신사는 전국각지에 7만9천152 개 사(1992년 통계)를 각 지역의 신사로 거느리고 있으며, 해마다 7월(음력 6월)에 한국신 '우두천왕'을 모시고 제사를 드리며, 마쓰리를 성대하게 거행한다.
일본 4대 축제 중의 하나 '타나바타 마쓰리' 견우직녀 신화가 일본으로 건너간 칠석제
견우직녀 신화를 다시 보자
북한에 있는 덕흥리 고분에는 귀중한 벽화가 그려져 있다. 견우와 직녀신화를 벽화로 그린 것이다.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견우는 염소 만한 크기의 소를 끌고 견우성을 향하여 떠나고, 직녀성이 자미원 밖에서 견우를 배웅하는 그림이다. 이 그림은 고구려시대의 견우와 직녀 천문도를 의인화하여 그린 천문도이다. 우리는 이 천문도를 봄으로써 고구려시대에 칠석날 칠석제를 지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칠석날은 인류의 조상인 나반那盤이 천하天河(은하수)를 건너서 하나님을 만나러 가는 날이다.(한단고기 太白逸史 三神五帝本紀) 그에게는 하나님을 만나서 단판을 지어야 할 일이 있다. 장마를 그치게 하는 일이 그가 하는 일 중에서 가장 큰 일이다. 그는 담판을 끝내고, 그 징표로 소 한 마리를 받아서 이끌고 은하수를 건넌다. 음력 칠월 초승에 장마가 그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견우는 땅에서 인류의 조상이 된다. 그를 배웅하는 직녀는 땅에서 인류의 조상인 아만阿曼이다. 그는 후대에 와서 최초의 문명인인 마고麻姑로 다시 태어난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나반이 칠월칠석날 은하수를 건너서 하나님을 찾아가야 하는가? 옛날에는 천기의 순환주기를 1월∼6월, 7월∼12월 둘로 보았다. 첫 주기는 1월에서 6월까지인데, 이때 천기가 왕성하다. 이 기간이 시작되는 섣달 아침에 달이 뜨고, 정월 초하루에 음과 양이 만난다. 왕旺한 천기는 6월에 가서 극極에 달한다. 이때 하늘의 수문水門이 열리고 거대한 빗줄기가 땅을 향하여 퍼붓는다. 이것이 6월 장마이다.
두 번째 주기는 7월∼12월인데, 천기가 왕성하지 못하다고 보고 이를 폐廢하다고 하였다. 폐한 천기는 7월에 시작하고, 해가 중천에 있을 때 달이 뜨므로, 이때를 시작의 시기로 보았다. 이 날 나만이 천하를 건너서 하나님을 만남으로써 지루한 6월의 장마 기운이 사라진다. 칠월칠석은 이렇게 나만을 통하여 장마가 끝났음을 선언하는 날이다.
서울 삼각산 도솔암에서 1999 역사 천문학회여자 회원들이 칠석제를 지냈다.
일본의 무당이 거대한 짚신에 들어가 신을 받는 장면. 우리 고분에서 발굴되는 청동리신앙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우리의 견우직녀신화를 축제화 한 '타나바타 마쓰리'
일본 쿄우토에는 매년 5월에 열리는 해바라기 마쓰리葵祭(아오이 마쓰리), 기원 마쓰리祗園祭(기온바쓰리), 시대마쓰리時代祭의 3대 마쓰리가 있고, 이에 필적할만한 마쓰리로 7월 칠석날 열리는 타나바타 마쓰리七夕祭가 있다.
타나바타 마쓰리는 우리의 칠석제처럼 음력 칠월칠석날 지내지 않고 양력으로 지낸다. 이 날 비가 오면 견우성과 직녀성이 은하수를 건너지 못하므로 1년을 더 기다려야 한다고 한다. 일본 사람들은 이 전설이 중국에서 전래된 것이라고 믿고 있다.
칠월칠석 전날 밤 사람들은 대나무로 특별한 장식물을 꾸민다. 거기에 자신의 희망이나 소망을 종이短冊에 써 대나무에 매달아 별에 기원한다. 칠석은 일본어 타나바타(棚機, 七月)라고 하는데, 특히 센타이仙台 지역의 칠석제가 특히 유명하다.
일본의 오절목五節目 중 하나로 꼽히는 이 축제는 나라奈良시대에 시작하였는데, 견우성과 직녀성의 만남을 축하해 집 마당에 대나무를 세워 오색 종이에 노래 말과 글을 써서 나무판枝葉으로 장식한다.
그리고 자기의 희망, 소망 등을 별에게 들어달라고 기원한다. 당초에는 일본 궁중에서만 지내던 축제였는데, 근세에 와서 차츰 민간에 보급되면서 전국적 규모로 확대되어 성대한 축제가 되었다.
그러나 근세에는 이 축제가 별에 기원한다는 의미가 퇴색하고 칠성을 장식하는 취향쪽으로 기울어졌다. 즉 롱籠이나 단책 띄우기 등으로 장식의 규모가 화려해지고 대규모화한 것이다. 그러니까 소망 등을 기원하는 축제에서 꾸미기 장식 축제로 둔갑한 감을 준다. 그렇다고 해도 이 축제처럼 전국 각지에서 성대하게 열리는 축제도 없다.
쇼와昭和 54년 브라지의 쌍파울로시에 이 축제가 소개된 이래 그곳 축제로 정착하고 제 7회 때부터 '센다이 축제'로 그 명칭까지 붙이고 있다. 그리고 쌍파울로주의 연간 예산까지 활당 받으며 등록되어 있다.
이를 일본 사람들은 일본의 문화나 축제가 외국에 소개되는 예는 흔하지만 일본의 고유한 축제 즉 마쓰리가 외국 대도시의 축제로 전래된 예는 역사상 없는 일로 자신들도 놀라워한다.
본디 마쓰리라는 말은 한국어 즉 신라어이다. 특히 기원 마쓰리에서 가마꾼들이 가마를 메고 거리를 누비며 "왔소이! 왔소이!"하고 구령을 외쳐대는 것은 한국인 정복왕들이 자기 조상신을 왜 나라로 모셔가 제를 올렸는데, 조상신을 맞는 영신迎神 강림을 '맞는다'는 뜻에서 '강림 맞으리'가 마쓰리로 변음 된 것이다. 한국에서 조상신이 왔으니 맞아야 한다고 '왔소이'를 외쳐대는 것이다.
일본의 4대 마쓰리는 단군왕검이 선포한 덕교의 흔적 일본 신도의 핵인 시빙神憑과 계불
일본의 첫 무당 신공왕후
신이 있으면 말씀이 있다. 그 말씀을 들어 전하는 사람이 무당이다. 일본에서는 무당이 신들려 공수를 내리는神憑 행사를 마쓰리祝祭라고 한다. 일본 무녀가 마쓰리에서 우리 무당이 굿을 하면서 내리는 공수와 같은 종류의 공수를 내리는 것이다.
<일본서기>는 일본에서 첫 공수를 내린 사람으로 신공황후神功王后를 들었다. 신공왕후는 남편 충애천왕仲哀天王이 일찍 죽을 것을 그가 받은 신의 탁선託宣 즉 공수를 통하여 알고 있었다. 신공왕후는 남편이 죽자 액을 풀어내기 위하여 이와노미야齋宮를 짓고, 이와노미야에서 신의 말씀을 들어 공수를 내렸다.
계불인 푸닥거리를 할 때 무악을 연주하는 대산자待産者(재비)가 '신주(무당)'가 내리는 신빙(공수)을 들어보고 신빙이 맞고 맞지 아니 함을 판단하였다. 재비가 거문고를 켰기 때문에 거문고선생이라고 하였고, 신빙이 맞고 맞지 아니함을 판단하므로 심신자審神者라고 하였다. 심신을 일본말로 세이지야正邪라고 하였다.
일본 무당의 공수 신빙(神憑)과 푸닥거리인 계불
신빙의 원형이 지금도 현대의 음양도陰陽道와 수험도修驗道 등 현존하는 세간의 무속신앙에 흡수되어 계승되어 오고 있다. 마쓰리에서 신빙은 가장 중요한 핵심적인 기능을 한다. 이는 우리 굿에서 공수가 중요한 기능을 하는 것과 같다.그러나 우리의 대동굿이나 도당굿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신명이 마쓰리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이는 일본에 개인주의가 팽배하여 집단성을 강조할 수밖에 없는 신빙의 메시지를 외면하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대답 없는 메아리와 같다고나 할까, 현재 신빙의 신명은 거의 없는 상태이다.
요란한 축제의식에 흡수된 껍데기뿐인 신빙이 있을 뿐이다. 신명이 나타나지 않는 신빙은 종교성이 고갈된 채 쇼로 고착화된 상태에서 한 가닥 푸닥거리에 종교로서의 존재방식을 찾는다. 일본사람들은 전통적으로 푸닥거리를 죽은 자의 혼을 받아들이는 방법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의 젊은 일본인들은 이를 믿지 않는다. 나이 먹은 사람들은 이를 걱정한다. 신도의 사상이나 일본인의 민족성을 잃게 하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한다. 학자들은 일본의 고대인이 왜 그렇게 무당을 통하여 신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였고, 푸닥거리를 하려고 하였는지 그 열성의 본질은 일본의 고대인이 태초에 신에게서 나왔다는 인간관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를 확인하기 위하여 신빙을 하고 푸닥거리를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푸닥거리도 지금은 형식화하여 그 순수성이 사라지고 말았다.
일본의 신도에 남아 있는 단군신앙의 흔적 세덕신歲德神
일본인들은 한 해를 '도시(나이)'라고 한다. '도시'는 벼, 벼이삭이다. '도시'에는 세신歲神, 세덕신歲德神이라는 뜻이 있다. 풍작을 의미하는 모든 곡령穀靈을 의미한다. 세덕歲德이라는 말은 단군왕검이 선포하고 가르친 덕교德敎와 관련이 있는 말이다. 덕교는 우주만물의 이치 중에서 세덕을 중요시한다. 일년이 춘하추동을 거쳐가는 것을 사덕四德이라고 한다. 춘하추동이 반복하는 우주운행의 이치를 받아들여 삶의 기본으로 하는 것을 검덕儉德(天地否卦)이라고 하였다. 검덕은 우리에게는 남아 있지 않고, 다만 역경易經의 효사爻辭에만 남아 있다.
사덕의 우두머리가 춘분인데, 세수歲首 다음에 오는 것이 춘분이다. 세수가 어김없이 찾아오는 법칙성을 세덕歲德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세덕도 우리에게는 남아 있지 않지만 일본에는 남아 있다. 왜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있을 수 있는가? 그 이유는 우리가 단군왕검을 통째로 버렸지만, 역경이나 일본의 신도가 단군왕검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본은 세덕신을 종교화하였다. 그래서 세신이 산에 가 있는 동안 만물이 숨을 죽이고 새 생명이 태어날 때를 기다린다고 하였다. 그래서 겨울에는 죽음에 걸린 태양을 부활시키기 위하여 태양제사太陽祭祀를 지낸다. 진혼제도 원래 태양제에서 유래하는 것인데 이를 무녀(심신자)가 주관했다는 것이다.
동지가 지나면 봄이 찾아온다. 이때는 조령에게 풍작을 비는 조령제를 지낸다. 조령제는 정월에 행하는 각가지 마쓰리를 말한다.
덕교의 유습으로 보이는 일본의 4대 마쓰리
이른바 일본의 4대 마쓰리는 정월제正月祭, 봄의 떡국을 먹는 도시고이(나이를 먹는다는 뜻) 봄 축제, 여름의 조령제, 가을의 신상제新嘗祭를 들 수 있는데, 이들 4대 마쓰리는 4계절의 순환과 재생을 축으로 해서 전개되며 계승되어 왔다.
이를 다시 말하면 춘하추동제가 되는데, 사계절을 숭상하기 위하여 축제를 만들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사계절을 숭상하자는 것이 이른바 단군왕검이 선포한 덕교이다. 이를 시행하는 것이 검덕이다.
덕교가 일본화 한 것을 신도라고 해도 과히 본지에서 어긋나는 말은 아닐 것이다. 신도는 ① 고천원高天原, ②신사神社와 어신체御神體, ③ 마쓰리, ④ 신빙神憑 ⑤ 계불의 다섯 가지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이를 일본신도의 키워드라고 한다.
마쓰리의 나라 일본 일년 내내 마쓰리로 결속을 다진다.
'잠 쫓기 행사'가 된 칠석제
아오모리(청삼靑森)의 네부타 마쓰리, 아키타의 칸도우(간정竿 )마쓰리, 센다이(선대仙臺)의 칠석마쓰리를 '동북 3대 마쓰리'라고 하는데, 이 3대 마쓰리는 꼭 한여름에만 열린다는 특징이 있다.
네부타 마쓰리는 8월 2일∼ 7일, 칸토우 마쓰리는 8월 4일∼ 7일, 센다이 마쓰리는 8월 6일 ∼ 8일 등 거의 동시에 열린다. 센다이의 칠석제가 8월 6일 ∼ 8일에 열리는 것은 음력 7월 7일에 열리던 것을 쇼와(昭和) 초에 초에 양력 칠월칠일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이들 3대 마쓰리를 한여름에 개최하는가. 실은 네부타 마쓰리도 칸토우 마쓰리 도 칠석제의 변형이다.
일본의 칸토우마쓰리 , 신라의 관등놀이가 건너간 것이다.
일본의 제등행사는 신라의 관등놀이가 건너간 것
일본인은 한여름에 졸음이 몰려와 일을 하는데 방해가 되므로 졸음(수마睡魔)을 쫓고 사령 邪靈을 떨어내고 풍작을 기원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잠을 쫓는다'는 행사로 시작된 것 이라고 한다. 옛날에는 음력 7월 7일에 행하던 것을 센다이의 칠석과 마찬가지로 양력으로 바꾸어 지내기 시작하였고, 이 3대 마쓰리 모두 잠을 쫓아 버리는 행사로 한여름인 8월에 성대하게 거행한다.
이 네부타 마쓰리 등 마쓰리는 부채, 인형, 동물모양으로 만든 큰 등(정롱 籠)에 불을 켜 고 잡아 돌리며 행진한다. 아오모리 시 주변에 있는 각 도시에서 이와 흡사한 생사를 많이 한다. 홍전시弘前市의 마쓰리를 '네부타'라고 하는데, 아오모리 시의 마쓰리는 홍전 시에서 전해진 것이다. 아오모리 시가 교통의 요지로 발전함에 따라 규모가 성대해 지고 유명해졌다.
아키타의 칸토우 마쓰리도 네부타와 마찬가지로 칠석제의 '잠 쫓기' 행사로 시작된 것이다. 긴 죽간竹竿에 많은 제등提燈을 끼우는 것을 간등이 오곡 풍요를 기원하는 마쓰리이기 때문 에 이나리(도수稻穗)의 형태를 나타내는 것이다. 수백 개의 불을 켠 등이 밤거리를 메우고 행렬하는 것이 볼만하다. 이 동북 3대 마쓰리는 중요 무형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일본에서 한밤에 등을 밝히는 행사는 신라 때 성행했던 관등놀이가 건너간 것이다. 한반도 에서 신라 이후에 고려시대에도 전국적으로 성대하게 거행되었으며 이에 따라 등을 만드는 등공예가 발달하였고, 등의 종류도 40 종이 넘었다. 이 시대엔 대문 앞에 장대를 세우고 등 들을 내려 달거나 줄을 가로로 매어 옆으로 하나하나 매달아 등의 수를 가지고 신분을 과시 하기도 하였다.
관등놀이는 조선시대에 와서도 남산과 북악에서 일제히 대대적으로 불을 밝 히는 행사로 이어졌다. 지금은 부여의 시조 해모수가 부여를 건국한 날인 4월 초파일에 불 교신도들이 서울 중심가를 행진하는 행사로 명맥을 이어 오고 있다.
3대 마쓰리의 나라 일본
일본 사람들은 어떤 것이든 격(格)을 붙이는 것을 대단히 좋아한다. 대단히 큰 것, 아름다운 것, 유명한 것 등 근사한 것 3점을 골라서 일본의 삼경三景, 일본의 삼명산三名山 등으로 부르기를 즐긴다. 무엇이든 셋을 뽑는다. 이는 일본이 3이라는 숫자를 숭상한다는 단적인 예가 된다.
일본이 3이란 숫자를 숭상하는 유습은 3을 숭상하는 한국계 사람들의 피가 오랜 세월을 일 본에서 면면히 흘러 오기 때문이다. 그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신시배달나라를 세운 한웅 천왕시대에 세운 삼신신앙, 삼태극사상, 음양조화철학을 탄생시키는 일석삼극의 사유체계에 서 비롯한다.
마쓰리의 세계에서도 3대 마쓰리를 뽑아야 직성이 풀리게 되어 있는데, 현실은 너나 없이 자기 고장의 마쓰리를 들고 나오므로 어느 것이 진짜 삼대 마쓰리인지 구별하기가 힘들다. 누군가 삼대 마쓰리를 정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일본에서 삼대 마쓰리를 들라면, 토우쿄우(동경東京)의 3대 마쓰리, 쿄우토(경도京 都)의 3대 마쓰리와 오오사카(대판大阪)의 3대 마쓰리 가운데에서 뽑아 낸 것을 든다.
쿄우토는 아오이 마쓰리(규제葵祭), 기온 마쓰리(지원제祗園祭), 시대 마쓰리(시대제時代祭) 를 쿄우토3대마쓰리라고 하고, 토우쿄우는 칸다 마쓰리(신전神田), 삼사 마쓰리(삼사제三社 祭), 산왕 마쓰리(山王祭)를 3대 마쓰리라고 하고, 오오사카는 애염 마쓰리(애염제愛染祭), 천신 마쓰리(천신제天神祭), 주길 마쓰리(주길제住吉祭) 등을 3대 마쓰리로 꼽는데, 일본 3대 마쓰리는 규제, 산왕제, 천신제 또는 지원제, 삼사제, 천신제의 세 마쓰리를 치기도 한다.
이밖에도 3대 마쓰리라고 칭하는 것이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전국적으로 널리 퍼져 있다. 이들 마쓰리는 일본 3대 기온제, 일본 3대 천신제, 일본 3대 선신제船神祭, 일본 3대 민요춤, 일본 3대 제등제提燈祭, 일본 3대천제大川祭 등등 3대를 붙여 부르는 마쓰리가 많 고, 이외에도 지방의 명칭을 붙여서 관동제關東祭, 북륙제北陸祭, 월후3대기제越後三大奇祭 쿄우토京都 3대기제라고도 하며, 관서關西 삼대기제, 큐우슈九州 3대기제로 부르기도 한다.
이처럼 일본은 마쓰리의 왕국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는 것 같다. 일년 내내 일본에서는 마 쓰리가 벌어진다. 마쓰리는 그 지방 특성에 맞게 치러지며 지역주민들은 이를 준비하며 결 속을 다진다.
일본의 샤머니즘 어제와 오늘 우리 무격신앙과 유사한 길을 걸어
반신半神 반인半人의 존재 일본의 박수 '미코'
일본에서 '샤머니즘'이란 무가巫歌를 부르며 진행하는 팔신의례八神儀禮에 의해 트랜스(Trans) 상태에 들어간 무자巫者가 神憑상태로 신령이나 인령人靈의 말을 하게 하거나, 조령祖靈의 세계에 들어가서 그 세계의 정보와 지식을 가지고 돌아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주술의례呪術儀禮를 말한다. 그러니까 일본의 샤머니즘은 무자가 입신하여 악령과 싸우는 서구적이거나 인도적인 샤머니즘과는 격을 달리한다. 조상신을 섬기는 우리의 무격신앙과 맥을 같이 한다. 일본에서 신령이니 인령이니 조령이니 하는 것은 조상신 그 자체를 부르는 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일본에선 옛날부터 무격巫覡을 '미코'라고 불렀다. '미코'란 <신자神子>, <어자御子>란 말로 '신의 아들' 즉 '신의 자식'을 뜻한다. 이들은 보통 사람들과는 달라서 반은 인간이고, 반은 신적인 존재를 의미한다. 샤마니즘에 관한 에피소드는 기기신화記紀神話에 자주 나온다. 일본에서 무격신앙의 기원은 유사有史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기록에 남은 것으로 가장 오래 된 것은 '鬼道샤마니즘'으로 알려진 <히미코(卑彌呼)>이다. <히미코>는 제정祭政을 관장한 무녀로서(魏志倭人傳) 일본의 첫 무당인 신공왕후神功王后이다.
일본 무녀의 원형은 젖이나 음부를 내놓고 춤을 추는 <아메노우즈>로 꼽는다. 가야금을 타며 트랜스 상태에 빠져 <아마데라스 오미카미>와 <스미요시산신(住吉三神)>의 탁언託言을 받아낸 신공왕후와 또 <아마데라스 오오미카미>의 신령을 받들어 모시는 제사를 올리며 신이 있는 곳인 진좌지鎭座地를 찾아 다이던 <야마토히메노미코도(倭姬命)> 등은 전형적인 무당이라고 해도 좋다. 히메노미코도를 재현한 것이 이세신궁伊勢神宮의 齊官이다. 이세는 신라에게 공격을 당하여 멸망한 이서국의 왕 이름이다. 이서가 일본으로 건너가서 이세가 된 것이다.
이서국은 지금의 청도군 이서면에 있었다. 이서국의 신앙이 일본으로 건너가서 정착하여 신도가 된 것인데, <아마데라스 오미카미>는 태양을 숭배했던 이서국의 신앙을 그대로 표현해 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신의 노여움을 달래며 공동체의 결속을 다지는 일본
공동체를 지배하는 것은 신이며, 신과 인간과의 사이가 순조로워야 풍요한 결실이나 전승戰勝 등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일본인의 생각이다. 신에게 불미스런 일이 있다면 모든 재앙이 공동체를 엄습한다. 그래서 무당은 공동체 유지를 위해 신의 뜻을 받들어 기혐機嫌(노여움)을 달래고 위로하는 일을 최우선으로 하였다. 여기에 샤먼의 필요성이 생겨난다. 야마토(大和) 조정이 왕권王權을 확립하기 전에 일본 각지에 <히미코>와 같은 무녀왕巫女王이나 무격왕巫覡王(박수왕)이 존재하여 제정祭政의 권한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 후 천왕에 의한 중앙집권제가 확립하면서 무녀는 크게 두 계열로 갈라졌다. 하나는 신사神社무녀로 각지의 신사에 소속되어 탁선託宣(공수) 하거나 신악神樂(옛날부터 입신入神을 하기 위한 테크닉이며, 동시에 신의 기혐을 달래고 신을 청배하여 놀게 하는 신유神遊의 기예技藝이다)을 춤추며 신에게 봉사해 온 사람들이다.
신사무녀는 옛날에는 신사를 대표하는 제신祭神의 신처神妻 노릇을 하는 신주神主였다. 그러나 헤인안(平安)시대에 남성신주가 등장하자 신악과 유다(湯立: 신 앞에서 하는 의식으로 대나무 잎으로 더운물을 끼얹으며 신탁을 고한다)를 전담하는 종사자가 되었다. 이와는 별도로 민간에서 활동하는 무녀도 존재하였는데, 이들은 정통계보에 따른 무업을 하는 이외에 고신孤神 등의 이단신異端神을 섬기며 이단신의 말을 중개하고, 가끔 서민을 모아놓고 광란의 춤을 추며 불길한 예언과 요언妖言으로 민심을 현혹하였다. 7세기 중반인 황극기皇極紀에는 나라 안의 무격(박수)들이 신어神語(신의 말)로 소란을 피우고 다니거나 민심을 흉흉하게 만드는 무자巫者가 나타났다.
그리고 민간인 무녀들이 무고巫蠱(벌래 등을 부작으로 써서 상대방을 해치는 비법)를 하거나 주살법呪殺法을 행하는 등 그들이 저지르는 해악이 사회를 병들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여, 쿄우토 안에서 활동하던 무격(박수) 17 명이 먼 지방으로 유배당하기도 하였다.(天平勝寶 4년 752) 어령御靈신앙이 일본을 뒤집을 무렵에는 민간인 무녀들은 신령神靈 뿐만 아니라 사령死靈의 말을 중개하거나, 생령生靈(인령人靈)의 말을 중개하는 무업이 번성하였다.
이들을 '떠돌이 무녀', '구기口寄무녀'(죽은 사람의 영혼을 불러 그 영혼의 말을 자기 입으로 전하는 무녀)라고 하였다. 이들은 보다 깊숙이 민중 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이들은 탁선 등만을 행하지 아니 하고, 생계에 도움이 된다면 가무, 점술. 주술. 매춘 등 닥치는 대로하며 갖가지 수단으로 생계를 꾸려갔다.
이들의 변모는 당시 사회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들은 예능자로서도 한목 할 만큼 예능이 뛰어난 자들도 있었다. 심지어 민간 음양사陰陽師(점쟁이) 수험자 등과 부부가 되어 살아가기도 하였다. 또한 신들린 자로서 신과 부처님의 공덕을 창도唱導하며 다양하게 살아가면서 중세에서 근세에 이르기까지 일본 종교의 하급구조를 지탱하였다. 이들은 오늘날의 당집을 짓고 들어앉아 신흥종교의 敎祖로서 시조가 되기도 하였다.
일본인의 무병巫病과 내림굿인 성무의례成巫儀禮 일본사람도 무병을 앓고 무당이 된다.
일본 사람도 우리처럼 소위 신병이라는 무병을 앓는다. 무병을 앓아야 무인이라는 특수한 직업을 가질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무병을 앓지 않고서 어떤 신체적인 장애로 인하여 무인 이 되는 경우도 있다. 일본 사람이 무인이 되는 예는 다음 네 가지 경우에 해당한다.
첫째 신체적인 이유이다. 애초부터 장님으로 태어나거나, 멀쩡하던 사람이 실명하는 신체장 애가 발생하여 무인이 되는 형으로 일본 동북의 '이타고' 등에서 샤먼이 되는 사람들이 이에 속한다.
둘째 무병을 앓아서 무인이 되는 경우이다. 어느 날 갑자기 영적인 존재에 심신을 빼앗겨 환각증세를 일으키거나, 환청현상을 보인다. 또 환각과 환청에 사로잡혀 이상한 행동을 한다. 원인불명의 병을 앓다가 신을 받아들이면 병이 씻은 듯이 나아버린다. 심한 경우는 집안이 망하거나 가족이 죽는 등 재앙을 당하기도 한다. 이러한 경우에도 신을 받아들이면 재앙 이 끝난다.
무병을 경험하고 샤먼이 되는 타입의 대표적인 것에 오키나와의 '유타(무당)'가 있다. 그밖에도 몇몇 지방에서도 무병을 앓고 샤먼이 되는 사람들이 있다. 천리교의 나카야마(中山) 미 키 등 신흥종교 교조敎祖 대다수가 이 형에 속한다.
셋째 혈통에 의하여 샤먼이 되는 경우로 우리나라의 세습무와 같다. 할머니, 어머니가 딸이 나 손녀에게 무녀 직업을 물려주는 경우로 사국四國과 중국中國 지방에 이러한 가계를 전승 하는 샤먼 집안이 있다. '미코가미스지(神筋)'라고 불리는 가게 등이 이에 속한다.
넷째 경제적인 이유로 샤먼이 되는 경우가 있다. 생계의 수단으로 무업을 택하는 경우이다. 이런 사람은 스스로 선생을 찾아가서 제자가 된다.
첫째의 경우는 신체장애와 무병이 중복이 되는 경우가 많다. 둘째의 경우 무병은 때로 정신적 위기나 육체적 위기를 부른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신령이 그 인물을 앞으로 자 기 수족으로 사용하기 위해 인간시대의 가혹한 실험 즉 죄예罪穢나 업을 씻어버리기 위해서 실험한다고 설명한다.
무병은 누구나 걸리지 않는다. 유타가 될 수 있는 자질과 운명을 타고난 자가 일정한 시기가 되면 신의 힘으로 소명되어 좋든 싫든 무병에 걸린다. 그가 무병에 걸렸는지 걸리지 않 았는지 하는 판단은 경험이 풍부한 선배 유타가 한다.
무교적 성격이 현저한 신흥종교의 여성 교조는 이러한 타입들이다. 일본개조日本開祖의 출 구出口 '나오'와 천리교의 개조 나카야마 '미키'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보통 무병에 걸린 자는 내 안에서 들리는 신의 소리나 명령에 크게 반발한다. 그러나 신의 제자가 되어 불림을 받는 것이 사명이며 숙명이라고 여기고 신을 받아들이면 무병이 낫는 다. 그 시점에서 자신은 죽고 샤먼으로 거듭난다고 믿는다.
일본식 내림굿인 성무의례成巫儀禮
성무의례는 무인이 되기 위하여 행하는 통과의례이다. 내용은 각지방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 만, 일정한 수행을 마친 후 제자의 심신을 교체하는 상태로 이끄는 점은 공통이다. 일본의 유명한 무 녀선생인 '이타고'가 행했던 수업과정을 한 학자의 보고서에서 발췌하여 소개한다. '이타고' 의 성무의례는 먼저 신부모인 사장에게 입문하는 과정을 거쳐서 다음 단계로 단식과 목욕재 계로 심신을 정하게 한 후에 성무의례인 일본식 내림굿으로 들어간다.
① 사장師匠(신부모) '이타고'의 제자로 들어가 경문을 암송하며 1천 일을 정진한다.
② 단식斷食 단식 1주일, 염단鹽斷과 수후리水垢離(고리) 1주일. 소금을 먹지 않고 수후리는 신불神佛에 기도할 때 냉수로 목욕하여 심신을 정결히 하는 일이 염단과 수후리이다. 화단火斷 1주일 도합 3주일의 엄격한 금기생활을 보낸다.
③ 성무의례 기도가 끝나는 날인 만이일에 성무의례를 올리는 방으로 들어간다. 방에는 인줄인 시메나와(주연승注連承)를 치고, 중앙에 표俵 석 장을 놓는다. 제자는 거 기에 앉는다. 이어서 제자의 주위를 행자나 남녀 맹승盲僧들이 둘러싼다. 신부모는 무격 뒤로 온다. 이를 후험자後驗者라고 한다.
이때 행자는 묘메지타구(가지도嫁支度)라는 의복을 입는다. 팔에 각반을 끼게 하고 표를 올려 사방과 중앙의 명왕明王(오방신장)에게 절을 한다. 이것을 '배식고치기(配式)'라고 한다.
1) 제자는 알몸으로 통 속으로 들어간다. 제자의 양옆에는 유미고시(궁월弓 越)라는 도 우미가 서고 이때부터 '유미고시식'이 시작된다.
2) 행사 진행자가 수를 헤아리며 제자 머리 위로 물을 붇는다. 이때 유미고시 도우미 가 부동명왕不動明王(오방신장)의 진언眞言을 구송하면서 제자의 머리 위로 뽕나무 로 만든 활을 넘겨준다. 활을 받은 또 한 사람의 유미고시가 활을 넘겨 준 유미고시 에게 다시 넘겨준다. 이 넘겨주기를 반복한다. 유미고시식은 뽕나무 활을 3,333회 주 고 받기가 끝나면 끝난다.
3) 제자는 '요리노고헤이'라는 흰 천을 낀 나무(신대)를 건네 받고, 주변 사람들은 석 장경錫杖經을 함께 화창和唱한다. 이어서 반야심경을 화창한다. 반야심경 화창은 제자 에게 신이 들 때가지 계속한다. 제자는 작은 목소리로 주문을 낭송한다.
4) 신이 빠르게 오는 제자는 밤 12시전에, 늦게 오는 제자는 아침까지 신내림(神憑)을 계속한다. 제자에게 신내림이 되면, 방안에 둘러친 인줄이 스스로 '사카사카'하는 소 리를 내며 흔들린다. 이렇게 되면 제자는 표에서 굴러 떨어진다. 입신入神하여 탈아脫 我 상태가 되는 것이다.
5) "신이 드셨다. 어떤 신이 드셨는가?" 하고 신부모가 물으면, 제자는 "무슨무슨 신이 들었다."고 대답한다.
6) 제자를 얼싸안고 별실로 간다. 된장국이나 뜨거운 탕을 주어 먹게 한 후, 신부모가 부채, 지팡이, 묵주 등 신물을 준다. 마지막으로 강신시험을 하고 무사히 끝나면 제 자는 완전한 한 사람의 '이타고(무녀)'가 된다.
일본의 샤머니즘의 키워드 8가지
1. 빙의와 탈혼
샤머니즘에 있어서 신빙神憑(憑依)란 무격巫覡이 신령, 귀신, 인령人靈 등을 자기 의식에 받 아들여 일시적으로 그의 몸과 입을 빌려 행동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빙의는 외부의 영이 무격에게 달라붙도록 하는 수동적인 무술巫術이다. 탈혼脫魂은 무격의 의식(혼)이 그의 몸에서 이계異界(통상 영의 세계)로 분리되어 나가는 능동적인 무술이다. 일본의 샤머니즘의 세계에는 탈혼형의 무격보다는 빙의형의 무격이 압도적으로 많다.
2. 입신
뇌 안에 마약물질을 투여하여 종교적 고양상태로 이끌어 간다던가, 특수한 정신집중에 의 하여 자아의식의 활동을 억제시키고 입신상태에 이르게 함으로써 신빙이 가능하도록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는데, 문화적인 배경에 따라서 다양한 방법이 있을 수 있다.
임신을 하는 방법으로 마약과 술 등으로 <엑스터시> 상태를 만드는 것은 동서가 따로 없 다. <엑스터시>란 '자신을 초월해 자신 밖에 선다'는 어원에서 나온다. <엑스터시>는 서양 에서도 본래 종교적 신비주의와 밀접하게 연관이 되어 있는데, 자신의 내면에서 신을 발견 하고 신과 일체가 되는 특별한 경험이다. 불가에서 말하는 해탈과 열반에 이르는 경지가 바 로 불교적인 <엑스터시>이다.
무용에 의하여 <엑스터시>로 신빙하는 형식은 훗날 시라비요우시(白拍子, 헤이안시대의 가무) 등의 주술적 예능으로 전수되어 계승되었다. 이러한 주술적 무도가 집단화하면서 열 광적으로 노래하고 춤추며 쿄우토로 쳐들어간 10세기의 돌발적인 종교운동이나 정토종淨土 宗계의 춤추는 염불, 막부말기의 '에에, 에잖아'의 세상 고치기 사회운동 등으로 발전해 가고 있는 것이다.
손쉽게 마약 드럭(Drug)류나 술을 사용하거나, 또 수험修驗을 통하여 입신에 이른다. 수험에는 다음 몇 가지가 있다.
① 산악두수를 한다.
② 염불이나 직언독송을 하며 한계를 초월한 단식斷食, 단면斷眠, 단수斷水 등의 참롱고행도 한다.
③ 고행의 결과 불佛, 보살이나 천부의 계시를 감득感得한다.
무녀의 경우는 격렬한 가무歌舞를 하며, 단조로운 주문呪文을 읊는다. 성무의례成巫儀禮에 서 보이듯이 악기를 울려 정신을 집중한다. 이중에서 무용舞踊은 입신의 보편적인 방법이다. 아메노우르메의 과용 踊의 신화에 그 정경이 묘사되어 있다.
또 궁중 제사 중에도 무녀를 등장시켜 가무歌舞를 하게 한다. 예컨대, 11월 인일寅日에 해 아는 <진혼제>인 <타마시즈메>에서는 신지백 神祇伯 이하의 역원과 제사를 맡은 직능자들 이 모여 천왕의 옷 御服을 제단에 안치하고, 먼저 가야금과 피리의 합주를 시작한다.
다음에 가자歌者가 신과 통교通交하기 위하여 노래부른다. 간베(神部, 야마토 조정朝廷의 제사에 봉 사하는 집단) 등이 박수치며 리듬을 잡는 가운데 어무御巫(무녀)와 사루메 등 궁정의 무녀 가 춤을 춘다. 이에 의해 영력이 쇄잔해진 천왕의 어복에 태양신의 힘이 주입되며, 동시에 쇄잔해지고 분산된 천왕령이 굳건하게 어복에 스며들어 회복된다고 믿는다. 이리하여 천왕 령天王靈이 활성화 되는 것이다. <타마>푸리가 되는 것이다.
3. 토리모노(採物)
신빙하는 무녀, 영능자에게 없어서는 안될 주물에 <토리모노>가 있다.
<토리모노>는 무 녀가 몸에 지니는 주물呪物이다. <토리모노>란 자기 자신을 신이 달라붙는 '의대 依代요리 시로'화 하기 위한 주물로 옛날에는 신성한 식물로 사용했다.
즉 하늘의 암야호(岩屋戶, 이라야도, 바위집)에 계신 <아마데라스 오미카미>를 끌어내기 위해서 <아메노우즈메>는 사 가리고게(海苔, 김)를 어깨에 지고, 머리에 가발을 쓰고, 손에는 소죽엽小竹葉을 견대처럼 감 았다. 이것들이 식물 <토리모노>이다.
그밖에도 재무녀梓巫女가 사용하는 가래나무, <오키나와 유타>가 사용하는 이식(稻) 등이 있다. 식물 이외에 <토리모노>로 가장 많이 쓰는 것이 어폐(御幣, 고헤이, 신에게 바치기 위하여 종이나 흰 천을 가늘게 오려 나무에 끼운 것)로 민간의 구찌요세(口寄, 말문이 터져 공수를 내리는 무당)나 수험도(점쟁이)가 빙의기도를 할 때에 대다수가 이를 사용한다.
주
* 산악두수山岳 (야마다케도소우: 물욕을 버리고 불도佛道를 수행하는 승려의 탁발 행각托鉢行脚)
* 직언독송直言讀誦은 眞言宗이다. 불교의 한 종파로 쿠우카이(空海)가 중국에서 배운 불교교리를 토대로 하여 일으킨 종교.
* 참롱고행參籠苦行은 신사나 절에서 일정한 기간을 정해 놓고 머물러 기도하는 행위.
* 천부天部(덴부)는 제왕諸王의 신들. 사천왕四天王, 천룡팔부상天龍八部像 등의 불교 수호신의 총칭.
* 신기백 神祇伯의 신기神祇는 천신天神, 지신地神, 신기백, 영제令制로 神祇官의 장관長 官, 종사위從四位 이하 담당자이다.
4.제령除靈 - 의뢰자의 빙물을 떼는 방법
무격은 영물을 다룬다. 높은 자리에 있는 신뿐만 아니라, 살아 있는 이의 혼령, 죽은 이의 혼령, 원한 맺힌 이의 혼령을 떠나보내고, 고리(狐狸, 여우와 이리)의 의사를 중개하거나, 그것들을 떼어내는 일도 무격이 하는 일이다. 또 고객으로부터 빙물을 띄어 달라고 의뢰 받은 무격이 자기가 키우고 있는 고리 등을 원한이 있는 집(원가怨家)에 달라붙게 하기도 한다.
일본 민속학자 석총존준石塚尊俊의 취재 예에서 빙낙물의 실례를 인용해 본다. [이윽고 빙좌憑坐의 폐幣(이삭)가 ‘가사가사’ 흔들린다. 동시에 ‘삐용삐용’하며 2척尺가량 뛰어오른다. 여우가 따라붙었을 때는 ‘가사가사’ 흔들리지만, 뱀이 따라붙을 때는 ‘타라타라’ 흔들린다고 한다.
또 어폐御幣가 돌고 있는데, 우회전하는 것은 신이 붙었을 때이고, 그렇지 않고 외도外道일 때는 좌회전한다고 한다.] 신빙상태가 되면, 상좌(요리)와 문답이 시작된다. 그리하여 고심(狐心)을 듣고 나서 떨어져버리면 그것을 죽통竹筒에 넣고 봉해버린다. 그러면 죽통은 갑자기 무거워지고 종횡으로 끄덕거리며 돌아다닌다. 그것을 잡아서! 강에 띄운다던가 길거리 네거리에 버리던가 한다. 버렸다면 걸음을 멈추고 창을 부르고 그대로 뒤를 돌아보지 말고 돌아와야 한다. (석총존준石塚尊俊의 ‘일본의 빙물에서’) 이러한 빙물락은 무격외에 수험자, 음양사, 밀교승, 일연종의 행자들도 행한다.
또 점을 쳐서 빙물락을 판단하는 케이스도 있다. 일본 종교의 저변에는 종파를 불문하고 이러한 샤머니즘이 지탱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5.성문사聲聞師-광대로 전락한 무격
성문사는 북을 치고 춤을 추며 기도를 하고 주술을 행하거나 점을 치기도 하는 직업인이다. 피안경彼岸經, 곤사문경昆沙門經 등을 읽고, 잡다한 문부예門付藝(카도쓰게게이)로 종사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예술적인 일의 내용에서 명백히 밝혀진 것처럼 그들은 샤먼에서 영락한 자들이다. 그 뿌리에 대해선 ‘속법사설俗法師說’, ‘민간음양사설’ 등 여러 설이 있지만, 확실하지 않다.
어찌되었건 샤머닉한 주술을 행하던 자가 일종의 자리를 형성해 집단화된 것으로 무로마치(室町)시대에는 문적사원門跡寺院 지배 하에 들어가 봉사를 의무화한 대신 [성문도(道)]라는 총칭으로 잡다한 예능의 독점이 인정되었다. [성! 문도]가 하는 일에 대하여, [대승원사사잡사기大乘院寺社雜事記]는 “음양사, 금구, 칠성궁, 구세무, 분盆, 피안경, 곤사문경 등의 예능 칠도자七道者의 지배”라고 기록하고 있다.
칠도자란 원락猿樂(사루가쿠), 걸어가는 떠돌이무녀, 북치기, 발鉢치기(바리떼치기), 금金치기, 옆걸음치기, 원사猿詞를 말하며, 그 모든 주술 예능자를 가리킨다. 이들 중 ‘금치기’는 ‘징치기’라고도 한다. 중의 외모를 갖추고 문전에서 예능을 하는 사람으로 징을 치며 경을 읽고 희사를 얻었다. 또 ‘바리떼치기’는 공야空也의 흐름을 포함한 염불계의 예인으로 탁발용 철발鐵鉢이나 박(호리병박)을 두들기면서 염불을 하며 희사를 얻었다.
공수하는 무녀, 떠돌이무녀, 춤추는 무녀, 백박자白拍子 등을 위의 예인들과 일괄해서 같은 부류로 취급하는 것은 이들의 기능이 고대 샤머니즘에 연원淵源을 두고 있음으로 암시한다.
6.구기무녀口寄巫女-공수무녀
구기 즉 공수란 신빙한 무녀가 영물에 신들려 말하는 것을 말한다. 공수를 행하는 무녀를 구찌요세 즉 구기무녀口寄巫女라고 한다. 구기(공수)에는 ‘신이 들게 하는 신의 공수’인 [신구神口], 살아 있는 영혼이나 생! 사불명의 인간을 불러들이는 ‘살아있는 자의 공수’인 [생구生口], 죽은 자를 불러오는 ‘죽은자의 공수’인 [사구死口]가 있다. 이중 가장 많이 보이는 것이 [사구]로 ‘동북의 이타고’(일본의 유명한 만신)이 단독으로 이를 행한다. [사구]를 동북지방에선 ‘호도케오로시’라고 하다. [사구]는 또 ‘최근에 내린 공수’인 [신구新口]와 ‘시일이 경과한 후에 내린 공수’인 [고구古口]로 나뉜다. [신구]는 사후 49일 중간 기간 내에 나오는 공수이고, [고구]는 사후 100일 이후에 나오는 공수이다.
공수무녀는 한 때 떠돌이무녀, 재무녀梓巫女 등 민간 유행遊行의 무녀가 행하여 전국에 퍼졌는데, 근세 이후 엄청 증가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각지를 순행하는 떠돌이무녀는 존재하지 않고, 정주하여 강신기도 등을 행하는 배옥拜屋(오카미야)을 전업으로 하고 있다.
7.재무녀梓巫女-재궁梓弓을 울리며 신빙한다
가래나무로 만든 활이 재궁이다. 재궁을 주물呪物 즉 토리모노로 한 무녀로 공수를 하기 위해 제국을 순회하며 떠돌던 하급 민간무녀를 재무녀라고 하였다.
가래나무는 영산에 자생하는 신의 나무로 쓰여왔다. 무녀는 재궁을 죽봉竹棒으로 두들기! 며 활줄을 울린다. 활줄을 울리는 것을 명현鳴弦(메이켄)이라고 한다. 재무녀가 활줄을 울리면 악령이 쫓겨간다고 한다. 동북쪽 지방에서 성행하였다. [만엽집萬葉集]에 예부터 빙의의 침사枕詞로 사용되었다고 기록된 오래된 주물(토리모노)이다.
주
* 빙좌憑坐요리마시: 신령이 달라붙은 사람, 특히 기도사가 신령을 붙이거나 <탁선>을 연장 하기 위하여 동반하는 동자나 부녀, 인형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 문부예門付藝(카도스게게이): 부잣집 문전에서 행하는 예능 전문광대
* 금구金口(곤구찌): 금종이를 말아서 피우는 담배
* 구세무久世舞(쿠세마이): 남북조시대에 성행한 예능의 하나. 소년, 부녀 등이 새 모자를 쓰고 갖가지 치장을 한 다음 남장하고 장고 반주에 맞추어 춤을 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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