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기업 두고 보자’

2010. 4. 19. 18:51각종시사관련자료들

‘한국 기업 두고 보자’
경술국치 100년인 올해 한·일 산업계에 묘한 기류가 흐른다. 자존심 강한 일본 기업들이 한국 기업을 배우겠다며 한껏 몸을 낮추고 있다.

금융 위기를 발판 삼은 한국 기업의 대약진이 준 충격 때문이다. 하지만 우쭐할 일만은 아니다. 일본의 뼈를 깎는 자성은 거대한 역공을 예고한다. 세계 최고의 기술력도 그대로다. 한·일 기업이 진검 승부를 겨룰 최대 격전지는 신흥시장이다.

 
일본 언론의 한국 기업 특집 보도가 봇물을 이루고 있다. 지난 1월 경제 주간지 닛케이비즈니스는 삼성전자·LG전자·현대자동차·포스코를 '4천왕(天王)'이라고 부르며 세계를 석권한 이들의 경쟁력을 집중 분석한 커버스토리를 실었다.

여기에 다른 주간지와 일간지까지 가세해 '한국 기업 배우기'는 새로운 유행처럼 느껴질 정도다. 이들은 한국 기업에 현미경을 들이댄다. 기술 개발과 마케팅 전략은 기본이고 심지어 임금 체계와 토익 점수까지 파헤친다.

경제 주간지 다이아몬드는 소니의 과장 승진 기준 토익 점수는 650점인 반면 삼성전자는 920점이라며 소니가 세계시장에서 고전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실제 금융 위기 이후 한국 기업의 '독주'는 일본을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소니·파나소닉·샤프 등 걸출한 일본 기업들이 죽을 쑤고 있는 사이 삼성전자는 지난해 휴렛팩커드(HP)를 제치고 세계 1위 전자 기업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올해도 삼성전자는 일본 15개 전자 업체를 모두 합친 것보다 많은 순익을 벌어들일 것으로 예상된다.

자동차도 마찬가지다. 도요타가 사상 최대 리콜 사태에 발목이 잡혀 있는 사이 현대차는 세계 최대 자동차 시장으로 떠오른 중국에서 빠른 성장을 보이고 있다. 자동차와 전자는 전통적으로 일본의 제조업을 대표하는 핵심 업종이다.

최근 한·일 15대 기업의 순위 변화를 보면 한국세의 약진은 한층 두드러진다. 지난 2005년 매출액 기준 한·일 15대 기업에 포함된 한국 기업은 삼성전자(7위)와 현대차(12위) 두 곳에 불과했지만 2009년에는 삼성전자(3위)·LG(8위)·SK(9위)·현대차(12위) 등 4개 업체가 나란히 포진해 있다.

양국 기업의 희비가 엇갈린 직접적인 원인은 글로벌 금융 위기다. 위기의 진원지인 선진 시장에 치중해 온 일본은 곤경에 빠진 반면 꾸준히 신흥시장을 개척해 온 한국은 웃고 있다. 그동안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자랑하는 일본 기업은 소비자의 수준이 낮고 중저가로 승부해야 하는 신흥시장을 의도적으로 외면해 온 것이 사실이다.

이 때문에 이제는 선진 시장만 바라보는 고부가가치 전략을 포기하고 거대한 신흥시장의 중산층, 소위 '볼륨 존' 전략으로 활로를 모색해야 한다는 뼈아픈 자성론이 나온다.

일본 기업, 글로벌화·디지털화에서 뒤처져
일본 기업의 부진 원인을 좀 더 근원적인 차원에서 찾는 시각도 있다. 삼성전자에서 10년 동안 임원으로 근무한 요시카와 료조 도쿄대 특임연구원과 하타무라 요타로 도쿄대 명예교수가 함께 쓴 '위기의 경영, 삼성을 공부하다'는 글로벌화와 디지털화라는 제조 방식의 패러다임 변화를 일본 기업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질타한다.

정보기술(IT)의 발달로 등장한 디지털 제조 방식은 누구나, 어디서든 제품을 만들 수 있는 시대를 열었다. 혼신을 다해 최고의 제품을 만든다는 일본 제조업의 혼인 '모노즈쿠리'의 의미가 크게 반감된 것이다.

일본 기업들이 계속 엇박자를 내고 있는 사이 이런 흐름에 재빨리 올라탄 한국 기업들은 과감한 투자와 스피드 경영, 소비자 중심의 혁신을 통해 세계시장을 빠르게 장악해 나갔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한·일 기업의 진검 승부는 이제부터가 시작이라고 입을 모은다. 우선 한국 기업들에 날개를 달아준 원화 약세, 엔화 강세에 따른 '환율 효과'가 사라지고 있다. 또한 전열을 재정비한 일본 기업도 반격의 채비를 서두르고 있다.

장세진 싱가포르국립대 경영학과 교수는 후발 주자인 삼성전자가 소니를 따라잡은 비결을 분석한 저서인 '삼성과 소니'에서 "삼성이 소니가 과거 누렸던 절정기를 누리고 있다는 말을 듣고 있다"며 "이는 삼성이 소니가 10년 전에 보였던 교만함과 나태함을 보인다는 뜻"이라고 지적했다.

삼성전자가 경직된 기업 문화와 스피드 경영에 따른 '조직 피로' 조짐을 보이고 있는 것도 걱정스러운 대목이다. 장 교수는 "의욕적으로 추진한 네트워크 전략이 잘 풀리지 않으면서 소니가 고전하고 있다"며 "조만간 콘텐츠와 하드웨어·통신 분야를 결합하는 디지털 컨버전스가 더욱 촉진되면 소니는 가장 이상적인 사업 포트폴리오를 갖춘 기업으로 다시 부상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일본 전문가들의 분석은 보다 신랄하다. 하타무라 요타로 교수와 요시카와 료조 연구원은 "삼성은 '기초 체력'이 뒤진 사람이 '머리'를 잘 써서 앞서가는 것과 같다"고 꼬집었다.

기초 체력에서 앞서는 일본 기업이 머리를 써서 달려들거나 기초 체력은 떨어지지만 벤치마킹에 뛰어난 중국 기업이 나타나면 삼성도 단번에 궁지에 몰릴 수 있다는 섬뜩한 경고다. 이제 한·일 기업의 정면 승부는 막이 올랐다. 최대 격전장은 신흥시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