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명신 장군이 평생 묻어둔 비밀

2013. 12. 7. 09:43자유자재·멋대로

채명신 장군이 평생 묻어둔 비밀 …

적장이 맡긴 고아, 교수로 키웠다

 

 

서울현충원 사병묘역에 마련된 고 채명신 예비역 중장의 묘지에서

30일 삼우제가 열렸다. (집례 김흔중 목사)

특전사 군종 참모를 지낸 김충렬씨(75·목사)가 유가족들을 위해

아코디언으로 찬송가를 연주하고 있다.

[사진 최정동 기자]



30일 오후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의 제2 병사묘역.

 

지난달 25일 별세하면서 ‘장성묘역 대신 병사묘역에 묻히기 원한다’

 

유언을 남긴

베트남전의 영웅 고(故) 채명신 장군의 삼우제 가 치러졌다.

 

부인 문정인 여사와 아들·딸을 비롯한 유족들, 베트남전 참전 노병들이

추모 예배를 하며 고인을 기렸다.

 

이 자리에선 4일장으로 치러진 채 장군의 장례 기간 내내 빈소를 지키며

조문객들을 맞았던 채 장군의 동생 채모(76)씨가 보이지 않았다.

 

그가 나흘간 밤샘하며 쌓인 피로를 걱정해 “삼우제는 직계가족만으로

치를 테니 나오지 말라”는 문정인 여사의 배려 때문이었다.

그러나 동생 채씨는 채 장군이 60년 넘게 숨겨온 또 다른 미담의 주인공이다.

채씨는 채 장군이 1951년 초 강원도에서 생포한 조선노동당 제2 비서 겸

북한군 대남유격부대 총사령관(중장) 길원팔이 아들처럼 데리고 다녔던

전쟁고아였다.

당시 육군 중령이던 채 장군은 유격부대 ‘백골병단’을 이끌며 강원도 내에서

암약하던 북한군 색출작전을 펼쳤다.

 

채 장군에게 생포된 길원팔은 채 장군의 전향 권유를 거부하고

채 장군이 준 권총으로 자결했다.

그러면서 “전쟁 중 부모 잃은 소년을 아들처럼 키워왔다.

저기 밖에 있으니 그 소년을 남조선에 데려가 공부시켜달라”고 부탁했다.

적장(敵將)이지만 길원팔의 인간됨에 끌린 채 장군은 “그러겠다”고

약속하고 그 소년을 동생으로 호적에 입적시켰다.

 

이름도 새로 지어주고 총각 처지에 그를 손수 돌봤다.

소년은 채 장군의 보살핌에 힘입어 서울대에 들어가 서울대 대학원에서

이학 석사·박사 학위를 받은 뒤

서울 유명 대학에서 교수를 지냈다.

채 교수는 10여 년 전 은퇴했다.

 

두 사람은 채 장군이 숨질 때까지 우애 깊은 형제로 지내왔다고 한다.

채 장군의 자녀들은 그를 삼촌으로, 채 교수의 자녀들은 채 장군을

큰아버지라고 부른다.

 

문정인 여사는 지난달 29일 서울 동부이촌동 자택에서 중앙SUNDAY 기자와

 만나 “채 장군이 길원팔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채 교수를 동생으로 맞은 것”이라며 “채 장군이 생전에

길원팔 칭찬을 많이 했다.

 

적장이긴 하지만 사나이 중의 사나이라고 했다”고 설명했다.

문 여사는 “채 장군이 채 교수를 (아들이 아닌) 동생으로 입적한 건

채 장군의 나이(당시 25세)가 젊었고

채 교수와의 나이 차도 11세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채 교수가) 형님이 별세하신 데 대해 크게 슬퍼했다.

나흘 내내 빈소를 지켰다”고 말했다.

채 장군은 총각 시절 본인이 손수 소년을 돌보다 그가 고교생이 됐을 무렵

문 여사와 결혼했다.

하지만 그 뒤로도 주변 사람에게 소년을 맡기고 학비와 생활비를 지원해

서울대에 진학하도록 도왔다고 한다.

 

채 장군은 북한군 고위 간부가 데리고 있던 고아 소년을 입적시킨 사실이

문제가 돼 군 생활이나 진급에 불이익을 당할 가능성에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고 한다.

채 장군에겐 친동생 명세씨가 있었다.

하지만 51년 채 장군이 연대장으로 복무하던 5사단의 다른 연대에

소대장으로 배속돼 북한군과 교전을 벌이다 전사했다.

이에 따라 채 교수는 형제자매가 없던 채 장군에게 유일한 동생이 됐다.

채 장군 본인도 지난 5월 초 고인의 마지막 언론 인터뷰가 된 중앙SUNDAY의

‘이광재가 원로에게 묻다’ 대담 당시 비보도를 전제로

“길원팔이 자결하면서 데리고 있던 10대 남녀 아이를

돌봐달라고 내게 부탁했다.

 

여자아이는 전쟁통에 숨졌으나 남자아이는 아들처럼 키웠다.

사랑으로 키웠다.

대학 교수가 됐다”고 밝힌 바 있다.

채 장군은 당시 “그(채 교수)의 인생이 중요하니 비밀로 해달라”고

당부했다.

문 여사도 29일 인터뷰에서 “우리는 이런 사실을 절대 주변에 알리지 않고

지내왔고 앞으로도 마찬가지”라며 기사화하지 말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본지는 적장이 아들처럼 데리고 다닌 소년을 동생으로

입적시켜 대한민국 엘리트로 키워낸 채 장군의 선행이 이념 갈등 해소와

남북 화해의 귀감이 될 것으로 판단해 기사화를 결정했다.

채명신 장군이 김일성의 오른팔로 불렸던 북한군 간부 길원팔이 맡긴

소년을 동생으로 삼은 건 채 장군과 길원팔의 짧고도 극적인 만남 때문이었다.

 

51년 3월 25세 때 북한군 후방에 침투하는 한국군 최초의 유격부대

‘백골병단’을 지휘하던 채 장군(당시 중령)은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의

군량밭이란 마을을 급습했다.

“인민군 거물 길원팔이 숨어 있다”는 첩보를 입수한 직후였다.

채 장군은 그곳을 지키던 북한군들에게 평안도 말씨로 “중앙당에서 나왔다.

조사할 게 있으니 협조해달라”고 말해 안심시킨 뒤 그들을 전원 사살했다.

 

이어 세포위원장 집에 숨어있던 길원팔을 붙잡았다.

그에게선 김일성 직인이 찍힌 작전훈령과 전선 사령관들에게 보내는

친필 서한 등 특급 정보가 쏟아져 나왔다.

채 장군은 방에서 길원팔과 단둘이 마주보고 심문에 들어갔다.

채 장군의 질문에 침묵을 지키던 길원팔은 “네 놈은 누구냐”고 되물었다.

“대한민국 국군 유격대 사령관 채명신”이라고 답하자

그 썩어빠진 이승만 괴뢰도당 중 이곳까지 침투할 놈은 없다.

반란군 아니냐”고 쏘아붙였다.

채 장군은 자서전에서 “길원팔은 조금도 당황하거나 불안한 기색 없이

침착하고 당당했다.

그는 확실히 거물이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채 장군은 “당신 같은 사람은 나와 함께 남쪽으로 가면

영웅 대접을 받을 것”이라며 전향을 권유했다.

 

그러자 길원팔은 “썩어빠진 땅에 왜 가느냐”며 일축했다.

이어 “부탁이 있다.

김일성 동지에게 선물받은 내 총으로 죽고 싶다”고 말했다.

소년(채 교수)을 거둬달라는 부탁과 함께였다.

 

그의 의지를 꺾을 수 없다고 판단한 채 장군은 길원팔의 총에

실탄을 한 발 넣어 건네주고 몸을 돌려 방을 나왔다.

잠시 후 총소리가 났고 길원팔은 책상에 머리를 숙인 채 숨졌다.

 

훗날 “혹시라도 길원팔이 뒷통수를 쏠 것이란 걱정은 안 들었나”는

주변의 질문에

채 장군은 “늘 하나님이 방패가 되는 걸 믿었기에 두려움이 없었다”고 답했다.

 

채 장군은 양지바른 곳에 길원팔을 묻고 ‘길원팔지묘(吉元八之墓)’란

묘비를 세운 뒤 부하들과 함께 경례했다.

채 장군은 자서전에서 “적장이었지만 그는 충분히 경례를 받을 만한

장군이었다”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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