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7. 5. 12:09ㆍ고증·참역사연구
| ||
|
개털모자에 항공모함같은 헝겊 군화, 곳곳을 기운 이 복장이
1950년대 유년시절을 보냈던 대부분 한국인의 자화상이었다.
다 된 솜바지라도 좋다.
판자로 얼기설기 엮어 지은 2층 건물 곳곳에 피난민이 바글대고 있다.
고함 한번 치면 풀썩 주저앉을 듯 위태로운 건물 모습이
위기에 처한 조국의 모습을 상징하는 듯하다.
엄동설한 추위를 피하기 위한 땔감도 넉넉지 못했던 시대에
두 소년이 끌고 가는 수레에는
한 식구의 온기를 담보하는 행복이 실려있는 듯하다.
태평양을 건너온 미군복을 얻어 입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간혹 마음씨 좋은 미군 아저씨를 만나면 미국으로 입양되는 행운을 얻기도 했다.
연을 들고 포즈를 취한 소년들.
전쟁의 傷痕(상흔)을 잠시 잊은 듯 하다.
추위와 배고픔에 지친 한 아이가 탈진했는지
기둥에 머리를 기대고 있다.
마치 요즘 북한 장마당의 꽃제비를 연상케하는 모습이다.
미군 병사가 한 소년을 목욕 시키고 있다.
소년은 카메라를 들이대자 잔뜩 겁을 먹었는지 얼굴 표정이 굳어 있다.
노인이 문 긴 담배대를 고개를 외로 꺽고 바라보는 소년과
소년이 손에 쥔 깡통 속을 바라보는 노인.
전쟁은 노인의 빈 담배대와 소년의 빈 깡통 속에 있었다.
봇짐을 등에 진 할아버지와 망태기를 손에 든 손녀.
피난을 가는 일가족의 전형적인 모습.
이렇게 지게에 가재도구를 싣고
수백리 길을 걸어서 피난을 떠나야 했다.
길가에 앉아 참외 등을 팔고 있는 아낙들.
젊은이들이 가질 수 있는 직업은 날품팔이가 고작이었던 시절.
한 지게꾼이 피로에 지친 모습으로 길가에서 잠들어 있다.
황량한 벌판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한 어린이.
담요 한 장으로 매서운 추위를 견더낼 수 있을까?
포로수용소내에서 친공 포로들이 제작해 걸어 놓은 선동 포스터.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똥통을 운반하고 있는 공산군 포로들.
인민군 포로들의 숙소. 난민 캠프를 연상케 한다.
수용소에서 공산군 포로들이 한가롭게 목욕을 하고 있다.
피가 튀고 뼈가 조각나는 포연 자욱한 전장은 이들에겐 일장춘몽이었을까 ?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취사장. 흡사 무슨 공장을 연상케 한다.
수만 명의 포로를 먹이는 것도 간단치 않은 일이었다.
무장 경비병에 둘러싸인 채 뭔가 지시사항을 듣고 있는 인민군 포로들.
여유를 되찾은 인민군 여자 포로가 미소를 짖고 있다.
카메라를 응시하는 인민군 포로.
탁발승처럼 모포를 가슴에 두른 것이 인상적이다.
수용소 연병장에 모여 앉아 망중한을 즐기는 포로들.
거제도 포로수용소 경비병이 인민군 포로들로부터 입수한
철조망을 뜯어 만든 사제 무기와 도끼, 칼 등을 들고 있다.
가슴에 태극기와 양 팔뚝에 멸공, 애국이라는 글씨를 새긴 반공 포로.
밤마다 親共(친공)포로와 反共(반공)포로들의
살육전에 많은 포로들이 목숨을 잃기도 했다.
태극기를 들고 공산당 격퇴를 환영하는 마을 주민들.
삶과 죽음이 무시로 교차하는 전쟁에서
운이 좋은 사람들은 살아나고,
운이 다한 사람들은 한 점 흙으로 돌아갔다.
'고증·참역사연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혜초는 한국의 첫 세계인이었다 (0) | 2009.07.05 |
---|---|
제주도를 살린, 시대 앞선 ‘여성’ CEO 김만덕 (0) | 2009.07.05 |
구하기도 보기도 힘든 사진들 (0) | 2009.07.05 |
건군60주년 국군의날 (0) | 2009.07.05 |
美종군기자 한국전 당시 희귀 칼라사진 공개 (0) | 2009.07.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