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7. 5. 12:12ㆍ고증·참역사연구
혜초는 한국의 첫 세계인이었다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디지털 복원 전문가 박진호씨가 복원한 혜초의 모습.
유희경 복식문화연구원장과 김미자 서울 여대 교수의 고증을 거친 것이다.
'왕오천축국전'에 등장하는 순례지 녹아원.
부처가 깨달음을 얻은 뒤 처음으로 설법한 곳이다.
1908년 3월, 중국 둔황(敦煌)을 탐험하던 프랑스의 동양학자 펠리오는 석굴 속에서 제목도, 저자 이름도 없을뿐더러 곳곳이 떨어져나간 두루마리 하나를 발견한다. 그것이 바로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과 오도리크의 ‘동유기’,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와 더불어 세계 4대 여행기의 하나가 된 책이었다.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 열아홉 살 때인 서기 720년부터 4년 동안 인도와 중앙아시아 여러 나라를 순례한 기록인 이 책의 저자는 바로 신라 승려 혜초(慧超)였다.
역자는 1996년까지 ‘무하마드 깐수’라는 이름으로 살아왔던 인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5년 넘게 복역한 뒤 작년 사면·복권된 그가 여전히 이슬람학과 동서 문명교류사의 독보적인 학자라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이것은 국내 최초의 역주본(譯註本)이다. 더구나 이 역주본을 한 사람이 낸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한문·서지학과 불교, 중국·인도·동남아·서남아의 역사와 언어·풍속에 대해 두루 해박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원문 분량의 40배에 가까운 503개의 자세한 주석은 그 자체로 하나의 연구서다. 무엇보다 이번 역주서는 현존 ‘왕오천축국전’을 당나라 승려 혜림의 ‘일체경음의’에 나오는 ‘왕오천축국전’의 주석과 면밀히 비교했다. 그 결과 현존본은 본래 3권이었던 원본의 절략본(축약본)이었음을 밝혔고, 절략본의 총 분량은 지금의 6000여자보다 많은 1만1300여자 정도였을 것이라고 추산했다.
그동안 논란이 돼 왔던 “혜초는 과연 어디까지 갔다 왔나?”라는 의문에 대해서도 해답을 내린다. 혜초는 한국인 최초로 아랍 제국을 밟았다는 것이다. 책에 나오는 대식국(大食國)이 바로 그곳으로, 지금 이란 동북부의 마슈하드라는 것이다. 역자는 동양에서 혜초에 앞서 아시아 대륙의 중심부를 해로와 육로로 일주한 사람은 없었다며 혜초야말로 ‘한국의 첫 세계인’이었음을 강조한다.
이렇게 새 옷을 입고 우리 앞에 다가선 ‘왕오천축국전’은 매우 흥미롭다. 가령 파사국(페르시아)에 대한 서술을 보자. “대식은 파사 왕의 낙타나 방목하는 신세였으나 후일 반란을 일으켜 파사 왕을 시해하고 자립해 주인이 됐다. …의상은 예부터 헐렁한 모직 상의를 입었고 수염과 머리를 깎으며 빵과 고기만 먹는다.” 8세기 아시아 여러 나라들의 모습이 이렇게 구체적으로 묘사된 기록은 세계적으로도 드물다.
또 중요한 부분이 있다. 고국 신라에서 연마한 시재(詩才)를 서역 땅에서 남김없이 발휘해 이국 풍물을 멋지게 묘사한 ‘서정적 여행기’라는 점이다.
고국 ‘계림(신라)’을 그리워하는 그의 시는 애절하다. “길은 험하고 눈 쌓인 산마루 아스라한데/…/오늘은 하염없는 눈물 뿌리는구나”라는 시는 또 어떤가. 바람 불면 날아갈 듯한 초라한 행장을 갖춘 채 주황빛 구름 덮인 파미르 고원을 넘어가는 고독한 수도승의 모습이 떠올려지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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