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주와 운명

2009. 7. 5. 21:04가인역학원·가인명품작명·가인풍수원

사주와 운명

사주(四柱)는 그 자체로 이율배반(二律背反)입니다. 즉, 사주는 운명이 미리 정해져 있다는 전제(前提)하에 있습니다. 그런데 역(逆)으로 운명이 확고하게 정해진 것이라면 사주를 알 필요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어떤 노력과 행위도 운명을 바꿀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 선행(善行)을 하려는 의지도 필요없게 될 것이고 인간에게서 모든 희망을 빼앗아 버릴 것입니다. 따라서 명리학을 비롯하여 동양철학을 하는 사람들과 사주를 알고 싶은 사람들 모두 정확한 이해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사주는 결코 숙명론이 아닙니다. 만일 사주를 숙명론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지금 당장 다시 생각하기 바랍니다. 숙명론이라면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인간을 구속하고 좌절하게 하며 불행하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주는 선천적인 힘(또는 흐름)으로 보면 됩니다. 그러나 이는 높은 개연성 내지는 그렇게 되려는 경향이므로 인간의 노력과 정신수양에 의해 변화될 수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물론 이런 흐름을 바꾸기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예를 들자면 강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데 거꾸로 헤엄치는 것과 같습니다. 거꾸로 헤엄쳐 본 사람이라면 흐름을 거스르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 것입니다. 불가능하다고 포기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여러 사람이 힘을 합한다거나 기계의 힘을 빌린다거나 하면 어떨까요? 연어는 회귀하기 위해 자기 몸을 희생하여 수십킬로미터의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서 알을 낳습니다. 생명의 신비는 자연법칙으로부터 예외적인 현상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즉, 강물은 어디까지나 위에서 아래로 흐를 뿐이지만 생명체는 강물을 거스를 수도 있는 것입니다.

똑같은 사주이고 운세도 나쁜데 어떤 사람은 포기하여 손을 놓고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어떤 사람은 의지를 굽히지 않고 계속해서 노력합니다. 이 두사람의 결과가 같을까요? 또 똑같이 운세가 좋은 사람인데 어떤 사람은 그저 즐기기만 하고 자기관리를 하지 않고 방탕한 생활을 계속하고 또 어떤 사람은 선행과 정신수양으로 바르게 생활했다고 합시다. 이 두사람의 결과가 같을까요? 물론 숙명론자들은 그 역시 숙명이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자기 자신을 속이는 말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피할 수 없는 숙명이 현실적으로 있음도 인정치 않을 수 없고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한 행위도 인정치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점에서 불교의 인과응보론을 생각하게 됩니다. 즉, 현생의 피할 수 없는 숙명은 과거생 또는 현생에서 내가 지은 업에 의한 결과이고, 현재 내가 짓고 있는 행위에 의한 업의 결과는 금생안에 또는 내생에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단, 짓는 것(업)과 받는 것(과보)에는 그 업의 종류에 따라 짧으면 수년 또는 길면 여러 생(生)의 시간차가 있다고 합니다. 예컨대 벼는 봄에 심어 여름에 가꾸고 가을에 거두지만, 나무는 종자를 땅에 심어 다 크려면 수십년이 걸리는 것과 같습니다.

사주명리학을 비롯한 동양철학의 모든 학문은 완벽한 것이 아닙니다. 실제 적중에 있어서도 완벽하지 않고 학문적 원리로 보아도 논리가 부족한 부분이 많습니다. 예컨대 쌍둥이는 사주가 같습니다만 서로 다르게 살아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어떤 사람은 時를 3등분하여 세세히 따져야 한다고 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모두 논리가 불충분합니다. 또 쌍둥이가 아니더라도 같은 사주를 가진 사람이 지구상에 수천명은 될터인데 모두 운명이 같을까요? 그러나 그렇다고 사주가 엉터리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의 사주인 경우 실력이 뛰어난 역술인은 90%이상의 적중율을 보이기도 합니다.

사주명리학을 배우는 이유와 사주를 보는 이유는 자기자신을 알고 지혜롭게 살아가기 위해서입니다. 즉, 내 그릇의 크기가 얼마인지 또 나는 어떤 쪽에 소질이 있는지를 알고 바른 길을 선택하여 나가며 운세가 나쁘면 심신수양에 힘쓰고 운세가 좋으면 마음껏 뜻을 펼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