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를 들여다보면 수많은 사건들의 연속이었다고

2009. 7. 15. 11:07가인자료·靈淸·詩와 Tag

 

 

 우리 역사를 들여다보면 수많은 사건들의 연속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역사의 거울을 활용할 줄 아는 사람이 미래를 개척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보다 효과적인 역사 흐름에 대한 이해를 도모하기 위해 조선 시대의 간지가 포함되어 역사적 사건에 대한 간략한 정리를 해보겠습니다. 역사적 이해와 함께 간지와 보다 친근해지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조선조의 간지 관련 사건 목록 - 간지순서에 따른 배열

용어 관련 설명

용 어

해 설

사 건

사화(士禍)

조선 전기에 조정 중앙관료의 훈구파와 지방의 학계의 사림파 사이에 반목과 세력 싸움으로 주로 사림의 많은 선비들이 화를 입은 사건으로 4대 사화가 대표.

무오사화,갑자사화
기묘사화,을사사화

환국(換局)

조선 중기 이후 당쟁의 와중에서 권력을 잡았다가 다시 축출되는 과정의 연속이었기에 축출되었다가 다시 중앙 권력에 올라설 때 사용하는 용어.

갑술환국,정미환국
기사환국,경신환국

옥사(獄事)

사화나 환국과 달리 반역 등 중대한 사건과 관련된 인물을 다스리는 일로 사화, 환국, 무옥 등을 모두 포괄할 수 있는 용어.

기축옥사,을해옥사

무옥(誣獄)

상대 당파를 축출하기 위해 일종의 모함과 누명을 씌워 무고하게 옥사를 하게 하는 일이나 그 반대의 경우.

 신사무옥

양요(洋擾)

조선 후기 서양의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을 서양인의 소요라는 뜻으로 양요라 함.

신미양요,병인양요

통공(通共)

정조대에 상업의 활성화를 위해 시전의 독점 특권인 금난정권을 폐지하고 자유 상업 활동을 가능하게 한 정책.

정미통공,신해통공
갑인통공

박해(迫害)
사옥(邪獄)

조선 후기 서학과 천주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을 혹세무민하는 사교집단으로 규정 혹독한 탄압을 했던 일로 사옥(邪獄)으로도 표현함.

신해박해,을묘박해
신유박해,기해박해
경신박해,병인박해

각 내용별 간지 관련 사건에 대한 설명은 사건으로 이동하세요..

甲(갑) - 4년

乙(을) - 5년

丙(병) - 6년

丁(정) - 7년

戊(무) - 8년

갑자사화 (1504)
갑인통공 (1794)
갑오농민전쟁
(1894)
갑오경장 (1894)
갑신정변 (1884)
갑술환국 (1694)

을묘왜변 (1555)
을묘박해 (1795)
을사사화 (1545)
을사늑약 (1905)
을사오적 (1905)
을미사변 (1895)
을미개혁 (1895)
을해옥사 (1755)

병자호란 (1636)
병자조약 (1876)
병인박해 (1866)
병인양요 (1866)

정묘호란 (1627)
정미사화 (1547)
정미약조 (1547)
정미환국 (1727)
정미칠조약(1907)
정유재란 (1597)

무인정사 (1398)
무오사화 (1498)

己(기) - 9년

庚(경) - 0년

辛(신) - 1년

壬(임) - 2년

癸(계) - 3년

기축옥사 (1589)
기묘사화 (1519)
기묘과옥 (1699)
기사환국 (1689)
기유약조 (1609)
기유각서 (1909)
기해박해 (1839)

경자모계사건(1900)
경진북정 (1460)
경오왜변 (1510)
경신환국 (1680)
경신박해 (1860)
경술국치 (1910)

신사무옥 (1521)
신미양요 (1871)
신유박해 (1801)
신해박해 (1791)
신임사화 (1721-2)

임진왜란 (1592)
임오군란 (1882)
임신조약 (1512)
임술민란 (1862)

계축화옥 (1613)
계유정란 (1453)
계해조약 (1443)

 

 

조선조의 간지 관련 사건[1] - 연대순 [조선 전기]

 

 

간지 관련 사건

사건 개요

무인정사
(戊寅靖社)

1398년
태조 7년

◈ 왕위계승권을 둘러싸고 일어난 왕자 사이의 싸움으로 제일차왕자의난(第一次王子-亂), 방원(芳遠)의 난, 정도전(鄭道傳)의 난이라고도 한다. 정사(靖社)는 종묘사직 곧 국가를 잘 다스리게 한다는 의미이다.
 이성계(李成桂)의 조선 개국(開國) 후 창업공신(創業功臣) 정도전 일파와 태조의 제5왕자 방원 일파 사이의 권력다툼이 일어나는데, 마침 계비 강씨 소생인 제8왕자인 방석(芳碩)이 세자가 되자 방원이 정도전 일파와 세자 방석을 제거한 사건이다.

계해조약
(癸亥條約)

1443년
세종 25년

◈ 조정을 대표하여 변효문(卞孝文) 등이 일본의 쓰시마 도주[對馬島主]와 세견선(歲遣船) 등에 관하여 맺은 조약.
 1419년 쓰시마섬을 근거지로 하여 말썽을 부리던 왜인들을 정벌한 후, 한동안 조선·일본 사이의 왕래가 중단되었으나 쓰시마 도주의 간청으로 다시 삼포(三浦)를 개항하여 무역과 근해에서의 어획을 허락하면서 후환을 염려하여 종전에 비하여 상당한 제한을 가하는 구체적 조약을 체결하였다. 세종은 왜인들의 성품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먼저 위세를 떨쳐 그들을 정벌한 다음, 다시 은정(恩情)을 베풀어 그들의 살길을 열어주었다.

계유정난
(癸酉靖難)

1453년
단종 1년

◈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단종(端宗)으로부터 왕위를 빼앗기 위하여 일으킨 사건.
 세종(世宗)의 뒤를 이은 병약한 문종(文宗)은 자신의 단명(短命)을 예견하고 영의정 황보 인(皇甫仁), 좌의정 남지(南智), 우의정 김종서(金宗瑞) 등에게 자기가 죽은 뒤 어린 왕세자가 등극하였을 때, 그를 잘 보필할 것을 부탁하였으나 수양대군은 1453년 문종의 유탁(遺託)을 받은 삼공(三公) 중 지용(智勇)을 겸비한 김종서의 집을 불시에 습격하여 그와 그의 아들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경진북정
(庚辰北征)

1460년
세조 6년

◈ 함길도도체찰사(咸吉道都體察使)가 이끄는 조선군이 조선의 변방을 자주 침략하던 두만강 유역에 본거지를 둔 모련위(毛燐衛)의 우량하[兀良哈] 여진족을 정벌한 사건.
 결국 여진족은 조선에 복종하게 되고, 이를 계기로 조선의 국경개념은 더욱 북상·확대되었다. 1461년 갑산군을 도호부로 승격하여 진을 두고 삼수(三水)에 다시 군(郡)을 두는 등 갑산·삼수 지역의 방비를 강화하고, 조선영토로 간주하지 않았던 무산군(茂山郡) 지방을 조선의 영토로 끌어들여 이 지역에 하삼도(下三道)의 이주민이 정착하는 기틀을 마련했다.

무오사화
(戊午士禍)

1498년
연산군 4년

◈ 김일손(金馹孫) 등 신진 사류가 유자광(柳子光) 중심의 훈구파(勳舊派)에게 화를 당한 사화 사건.
 1498년 《성종실록》이 편찬되자, 실록청(實錄廳) 당상관(堂上官)이었던 훈구파 이극돈이 사림파인 김일손이 사초에 삽입한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이 세조가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은 일을 비방한 것이라 하고, 이를 문제삼아 선비를 싫어하는 연산군에게 고해, 연산군은 김일손 등을 심문하고 이와 같은 죄악은 김종직이 선동한 것이라 하여, 이미 죽은 김종직의 관을 파헤쳐 그 시체의 목을 베었다.

갑자사화
(甲子士禍)

1504년
연산군 10년

◈ 연산군이 자신의 어머니인 성종의 비였다가 폐출(廢黜)되어 사사(賜死: 1480년)된 윤씨(尹氏)의 복위문제에 얽혀서 일어난 사화(士禍).
 윤씨 사사(賜死)에 관여된 수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당했는데, 이후 국정과 문화발전에 악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곧 많은 선비가 수난을 당하여 학계가 침체되었고, 연산군을 비난하는 한글 방서사건(榜書事件)으로 언문학대(諺文虐待)까지 일어나 이후 국문학 분야까지 악영향을 끼쳤다.

경오왜변
(庚午倭變)

1510년
중종 5년

◈ 3포{부산포·내이포·염포}에서 일어난 일본인 거류민의 폭동사건으로 삼포왜란(三浦倭亂), 삼포의 난이라고도 함.
 3포를 개항한 이후 무역과 거류가 확대되어 계해(癸亥)조약 때 맺은 내용을 어기기 시작한 일본은 중종이 즉위한 이후에는 더욱 교만해져 조선의 통제에 대한 반발로 일으킨 반란이다. 이 난으로 조선과 일본 간의 교통이 중단되었는데, 일본이 다시 수교할 것을 간청해 와 계해조약을 개정하여 새로 임신(壬申)조약을 체결, 내이포만을 개항(開港)했다.

임신조약
(壬申條約)

1512년
중종 7년

◈ 조선과 쓰시마도주[對馬島主]가 맺은 조약. 국가재정을 고려하고 대외정책의 운용면의 시정을 위해 단행했다.
 내이포(乃而浦:熊川), 부산포(富山浦:東萊), 염포(鹽浦:蔚山)의 3포에 거주하던 왜인들이 진장(鎭將)과의 충돌로 난을 일으키자 조정에서 3포를 폐쇄하고 왜인과의 교역을 끊었는데, 주부식물(主副食物)의 공급을 대(對)조선 교역에 의존해오던 왜인들은 당장 생활에 곤란을 느껴 쓰시마도주는 조선과의 통교 재개를 위해 왜란의 주모자 참래(斬來), 피거인송환(被據人送還), 난야기(亂惹起)의 사죄 등 조선측의 요구조건을 이행하게 되었다. 한편 조선 정부에서는 왜와의 지리적 인접관계, 왜란 전까지의 일본관계, 교린정책이란 대의명분과 북서변 야인들의 소요 등을 감안, 9개 항목으로 된 임신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쓰시마도주의 간청을 들어주어 국교가 재개되었다. 이 조약에 따라 이전보다 확실한 근거를 가지고 왜인들을 제약할 수 있게 되었다.

기묘사화
(己卯士禍)

1519년
중종 14년

◈ 남곤(南袞)·홍경주(洪景舟) 등의 훈구파(勳舊派)에 의해 조광조(趙光祖) 등의 신진 사류(新進士類)가 축출된 사건.
 중종반정으로 중앙에 진출하게 된 사림파는 도학사상만을 강조하여, 훈구파를 소인으로 지목하여 철저히 배척하며, 현실을 무시하고 급진 정책을 시행하는 등 지나친 이상주의를 펼쳐 결국 훈구파는 홍경주의 딸이 중종의 후궁인 것을 이용하여, 궁중 동산의 나뭇잎에 꿀로 '주초위왕(走肖爲王)'의 4자를 쓴 뒤, 이것을 벌레가 갉아먹어 글자 모양이 나타나자, 그 잎을 왕에게 보여 왕의 마음을 흔들리게 했다. '走·肖' 2자를 합치면 조(趙)자가 되기 때문에, 주초위왕은 곧 "조(趙)씨가 왕이 된다"는 뜻이었기에, 남곤·심정(沈貞)·홍경주 등 훈구파의 사주도 있었지만, 신진 사류의 급진적·배타적인 태도에 염증을 느낀 중종은 결국 신진사류를 몰아내어 조광조는 능주(綾州)로 귀양가서 사사되고, 김정(金淨)·기준·한충·김식 등은 귀양갔다가 사형 또는 자결했다.

신사무옥
(辛巳誣獄)

1521년
중종 16년

◈ 신사년에 일어난 안처겸(安處謙) 일당의 옥사.
 안처겸은 이정숙(李正淑)·권전(權) 등과 함께 기묘사화로 득세한 남곤(南袞)·심정(沈貞) 등이 사림(士林)을 해치고 왕의 총명을 흐리게 한다 하여 이들을 제거하기로 모의했는데, 송사련(宋祀連)은 이러한 사실을 고변할 것을 모의한 후, 안처겸의 모상(母喪) 때의 조객록(弔客錄)을 증거로 삼아 고변해 안처겸,안당 등 10여 명이 처형되었고, 송사련은 그 공으로 당상관이 되어 이후 30여 년간 득세하였다.

을사사화
(乙巳士禍)

1545년
명종 즉위년

◈ 윤원형(尹元衡) 일파 소윤(小尹)이 윤임(尹任) 일파 대윤(大尹)을 몰아내어 사림(士林)이 크게 화를 입은 사건.
 종종 말기에 윤여필(尹汝弼)의 딸인 중종의 제1계비 장경왕후(章敬王后)와 윤지임(尹之任)의 딸인 제2계비 문정왕후(文定王后)의 외척간의 권력 싸움에서 시작되어 다음 인종(仁宗)대 장경왕후계의 대윤(大尹) 득세했다가 8개월 후의 명종 즉위 후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으로 소윤(小尹)이 정권을 잡고 대윤을 대거 몰아낸 사건이다. 1498년(연산군 4) 이후 약 50년간 관료간의 대옥사(大獄事)는 을사사화가 마지막이 되었지만, 사림세력은 중앙에 대거 진입하게 되었다.

정미약조
(丁未約條)
1547년
명종 2년

◈ 사량진왜변(蛇梁鎭倭變: 1544) 이후 단절되었던 일본과의 국교를 다시 허용한 조약.

정미사화
(丁未士禍)
1547년
명종 2년

◈ 을사사화(乙巳士禍)의 여파로 일어난 사화(士禍)로 "벽서(壁書)의 옥(獄)"이라고도 한다.
 괴벽서사건(怪壁書事件)으로 다시 많은 사림(士林)이 화옥(禍獄)을 입게 되었다.

을묘왜변
(乙卯倭變)

1555년
명종 10년

◈ 왜구가 전남 영암·강진·진도 일대에 침입한 사건.
 삼포왜란(三浦倭亂:1510)·사량진왜변(蛇梁鎭倭變:1544) 등으로 세견선(歲遣船) 출입이 금지된 것에 반발해 왜구(倭寇)가 배 70여 척으로 전남 연안지방을 침입해 만행을 저지르다 영암에서 격퇴되었는데, 이후 세견선 5척의 출입을 허락하였다.

기축옥사
(己丑獄事)

1589년
선조 22년

◈ 정여립(鄭汝立)이 조정에서 높은 벼슬에 오르지 못함을 불평해 모반을 꾀하다가 실패한 후 이를 계기로 일어난 옥사(獄事).
 정여립은 비기참어(秘記讖語), 즉 '목자망전읍흥(木子亡奠邑興)'이라 하여 '이씨는 망하고 정씨(鄭氏)가 일어난다'는 설을 이용하여 이씨왕조(李氏王朝)는 망하고 자기[정여립]가 임금이 된다는 등의 말을 퍼뜨려 인심을 현혹하여 큰 난을 일으키려 했으나 1589년 10월에 황해도 관찰사 한준(韓準) 등의 밀계(密啓)로 음모가 탄로나, 정여립은 아들 옥남(玉男)과 함께 진안(鎭安) 죽도(竹島)로 도망하였다가, 여립은 자살하고 옥남은 잡혀 왔다. 당시 서인(西人)이었던 정철(鄭澈)이 옥사를 주도해 수많은 동인(東人)이 화를 입게 되었다.

임진왜란
(壬辰倭亂)

1592년
선조 25년

◈ 1592년부터 1598년까지 2차에 걸친 왜군의 침략으로 일어난 전쟁. 97년의 제2차 침략전쟁을 따로 정유재란(丁酉再亂)이라고도 하며, 일본에서는 분로쿠 게이초[文祿慶長]의 역(役), 중국에서는 만력(萬曆)의 역(役)이라고 한다.
 전란으로 야기된 국제적 정세의 변화로 중국은 전란 중에 대두하기 시작한 여진의 청(淸)나라에 의해 명나라가 망하고 일본에서도 도요토미 대신 도쿠가와[德川]의 막부(幕府) 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

정유재란
(丁酉再亂)

◈ 일본이 임진년 1차 침입이후 1597년(선조 30년)에 다시 조선을 침략한 2차 전쟁.

 

 

 

 조선조의 간지 관련 사건[2] - 연대순 [조선 후기]

 

 

간지 관련 사건

사건 개요

기유약조
(己酉約條)
1609년
광해군 1년

◈ 임진왜란 이후 단절되었던 일본과의 국교를 재개하기 위해 일본이 끈기 있게 통교를 요청해 조선이 일본과 맺은 전문 13조의 송사조약(送使條約).

계축화옥
(癸丑禍獄)

1613년
광해군 5년

◈ 사색당파(四色黨派) 중의 하나인 대북파(大北派)가 일으킨 옥사(獄事).
 1608년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정인홍(鄭仁弘)·이이첨(李爾瞻) 등 대북파는 선조의 적자(嫡子)이며 광해군의 이복동생인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왕으로 옹립하고 반역을 도모하였다는 구실로 소북파(小北派)의 우두머리이며 당시의 영의정인 유영경(柳永慶)을 사사(賜死)하는 등 소북파를 모조리 몰아내었고, 선조의 계비(繼妃)이며 영창대군의 생모인 인목대비(仁穆大妃)와 그의 친정아버지 김제남(金悌男)을 몰아내려 했는데, 때마침 조령(鳥嶺)에서 은상인(銀商人)을 죽인 이른바 박응서(朴應犀)의 옥사가 일어났고 대북파는 이들을 문초할 때 김제남과 반역을 도모하였다고 허위자백케 하여 김제남을 죽였고 영창대군을 서인(庶人)으로 만들어 강화도에 유배하였는데, 후에 강화부사(江華府使) 정항(鄭沆)으로 하여금 그를 소사(燒死)하게 하였다.

정묘호란
(丁卯胡亂)

1627년
인조 5년

◈ 만주에 본거지를 둔 후금(後金: 뒤에 淸)의 침입으로 일어난 조선과 후금 사이의 싸움.
 광해군의 뒤를 이은 인조가 '향명배금(向明排金)' 정책을 표방하자 중원 지역으로 확장하려는 후금은 배후인 조선이 두려워 침략하게 된다. 강화로 피신한 인조는 강화조약을 맺고 조선과 후금이 형제지국(兄弟之國)이 되었으나, 후에 다시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난다.

병자호란
(丙子胡亂)

1636년
인조 14년

◈ 36년 12월∼37년 1월에 청나라의 제2차 침구(侵寇)로 일어난 조선·청나라의 싸움.
 1627년 후금(後金)의 조선에 대한 제1차 침입[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조선과 후금은 형제지국(兄弟之國)의 맹약을 맺었으나, 1632년 후금이 양국관계를 군신지의(君臣之義)로 고칠 것을 요구해 왔고, 1636년 국호를 청으로 고치고 조선을 쳐들어 왔다. 남산산성에서 치욕의 항복한 인조는 세자와 왕자, 삼학사(三學士) 등 많은 인질로 보내고 종속의 예를 다지게 되었다.

경신환국
(庚申換局)

1680년
숙종 6년

◈ 남인(南人)이 대거 실각하여 정권에서 물러난 사건으로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이라고도 하며, 이 사건으로 서인(西人)이 득세한다.
 1674년(현종 15) 예송(禮訟)에서의 승리로 정권을 장악한 남인은 현종에 이어 왕위에 오른 숙종으로부터는 신임을 얻지 못하다가, 인조의 손자이며 숙종의 5촌인 복창군(福昌君)·복선군(福善君)·복평군(福平君) 3형제가 남인인 허견과 결탁하여 역모하였다는 것이 발각된 '삼복의 변[三福之變]’을 계기로 남인이 대거 축출되었다.

기사환국
(己巳換局)

1689년
숙종 15년

◈ 숙종 초기인 1680년(숙종 6)의 경신출척(庚申黜陟)으로 실세하였던 남인(南人)이 1689년 원자정호(元子定號) 문제로 숙종의 환심을 사서 서인(西人)을 몰아내고 재집권한 일.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는 폐위되고 희빈 장씨가 정비(正妃)가 된다.

갑술환국
(甲戌換局)

1694년
숙종 20년

◈ 폐비된 인현왕후 민씨(仁顯王后閔氏) 복위운동을 반대하던 남인(南人)이 실권(失權)하고 소론과 노론이 재집권하게 된 사건. 갑술옥사(甲戌獄事) 또는 갑술경화(甲戌更化)라고도 한다.
 1689년의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집권한 남인(南人)이 희빈장씨(禧嬪張氏)의 왕비 책봉까지 승승장구 하다가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민암 등이 사사하고 소론의 김춘택(金春澤) 등이 집권한다.

기묘과옥
(己卯科獄)

1699년
숙종 25년

◈ 숙종대에 과거시험의 부정으로 일어난 옥사(獄事).
 단종(端宗)의 폐출과 시해 후 200년이 지난 숙종 때 단종을 왕으로 추존시키고, 이를 경축하기 위하여 증광과(增廣科)를 실시하여 임시로 과시를 시행했으나 이 과거에 상소로 '시험지 바꿔치기[符同易書]', '고군(雇軍) 바꿔세우기' 등의 부정이 있었음이 탄로가 나서, 시험은 파방(罷榜)이 됐다.

신임사화
(辛壬士禍)

1721년-22년
경종 1- 2년

◈ 1721년(경종 1: 辛丑年)-22년(경종 2: 壬寅年) 왕통문제와 관련하여 2년에 걸친 소론(小論)이 노론(老論)을 숙청한 사건.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남인이 축출된 뒤, 노론과 소론은 장희빈의 처벌문제를 놓고 대립하는데, 노론측은 장희빈이 정비인 인현왕후를 모해하였으므로 사사해야 된다는 주장을 한 데 반해, 소론측은 다음 왕이 될 세자를 위해 장희빈을 살려야 옳다고 주장하였다.
 노론은 경종 즉위 뒤 1년 만에 연잉군(뒤의 영조)을 세제(世弟)로 책봉하는 일을 주도하고, 세제의 대리청정을 강행하려 하였다. 소론측은 노론의 대리청정 주장을 경종에 대한 불충(不忠)으로 탄핵하여 정국을 주도하였고, 결국에는 소론정권을 구성하는 데 성공하였다.

정미환국
(丁未換局)
1727년
영조 3년

◈ 극심한 당쟁을 조정하기 위해 정국(政局)의 인사를 개편한 일.
 영조는 탕평책(蕩平策)을 강력하게 시행함으로써 노론(老論)·소론(少論)의 당쟁을 조정했다.

을해옥사
(乙亥獄事)

1755년
영조 31년

◈ 소론(少論)의 윤지(尹志) 등이 일으킨 모역(謀逆) 사건으로 나주괘서사건(羅州掛書事件)라고도 한다.
 윤지는 1722년(경종 2) 임인무옥(壬寅誣獄)에 연좌되어 나주로 귀양갔다가 노론(老論)을 제거할 목적으로 나주목사 이하징(李夏徵), 이효식(李孝植) 등과 모의하여 나주 객사에 민심동요 괘서를 붙였는데, 발각되어 거사(擧事)하기 전에 붙잡혀 영조의 직접 심문을 받고 2월에 박찬신(朴纘新) 등과 같이 사형을 당했다.

신해박해
(辛亥迫害)

1791년
정조 15년

◈ 정조대에 일어난 최초의 천주교도 박해사건으로 신해사옥, 진산사건(珍山事件)이라고도 한다.
 1791년 전라도 진산군(珍山郡)의 선비 윤지충(尹持忠)이 모친상(母親喪)을 당하여 신주(神主)를 불사르고 가톨릭교식으로 제례(祭禮)를 지낸 것에서 문제가 야기되어 조정에서는 사회도덕을 문란하게 하고 무부무군(無父無君)의 사상을 신봉하였다는 죄명을 씌워 사형에 처해 가톨릭교가 전래된 이래 최초의 순교자를 내었다. 이 문제로 남인은 신서파(信西派:가톨릭교 신봉을 묵인)와 공서파(攻西派:가톨릭교 탄압)로 대립하게 되어 1801년(순조 1)의 신유박해(辛酉迫害)로 신서파가 타격을 받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갑인통공
(甲寅通共)

1794년
정조 18년

◈ 조선 정부가 육의전(六矣廛) 이외의 다른 시전(市廛)이 가졌던 금난전권(禁亂廛權)의 특권을 폐지하고 자유상인과 수공업자들도 도성 안에서 자유로이 상(商)행위를 할 수 있도록 조치한 통공발매정책(通共發賣政策).
 정조가 실학자 채제공(蔡濟恭)의 건의를 받아들여, 육의전를 제외한 모든 시전의 금난전권을 폐지하는 통공정책을 실시해 상업 발전의 기틀이 되었다. 과정은 1787(정조 11)의 정미통공(丁未通共)과 1791년의 신해통공(辛亥通共)에 이어 1794년 갑인년(甲寅年)에 완성이 된 것이다.

을묘박해
(乙卯迫害)

1795년
정조 19년

◈ 청(淸)나라 신부 주문모(周文謨)를 체포 실패를 계기로 일어난 천주교(天主敎) 박해(迫害) 사건.
 이승훈(李承薰)·이가환(李家煥)·정약용(丁若鏞) 등이 유배되었고 후에 경신박해(1800년)·신유박해(1801년)로 이어진다.

신유박해
(辛酉迫害)

1801년
순조 1년

◈ 순조 즉위 후 정순대비 주도로 천주교도를 박해한 사건으로 신유사옥(辛酉邪獄)이라고도 한다.
 1801년 정월 순조가 왕위에 오르자 섭정을 하게 된 정순대비(貞純大妃)는 사교(邪敎)·서교(西敎)를 엄금·근절하라는 금압령을 내려 이승훈·이가환·정약용 등의 천주교도와 진보적 사상가가 처형 또는 유배되고, 주문모를 비롯한 교도 약 100명이 처형되고 약 400명이 유배되었다. 이 신유박해는 급격히 확대된 천주교세에 위협을 느낀 지배세력의 종교탄압이자, 또한 이를 구실로 노론(老論) 등 집권 보수세력이 당시 정치적 반대세력인 남인을 비롯한 진보적 사상가와 정치세력을 탄압한 권력다툼의 일환이었다.

기해박해
(己亥迫害)

1839년
헌종 5년

◈ 헌종대에 일어난 천주교 박해사건. 기해사옥(己亥邪獄)이라고도 함.
 이 사건은 표면적으로는 천주교를 박해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실제에서는 시파(時派)인 안동김씨로부터 권력을 탈취하려는 벽파(僻派) 풍양조씨가 일으킨 것으로 세도 정치의 단면을 보여준 사건이다.

경신박해
(庚申迫害)

1860년
철종 11년

◈ 경신년(庚申年)에 일어난 천주교도에 대한 박해. 1859년 12월 마지막 주에 시작되어 이듬해 9월까지 약 9개월 간 지속되었던 천주교도 탄압 사건.
 1839년(헌종 5) 기해박해(己亥迫害) 때 천주교도 색출에 공을 세운 금위대장 임성고(任聖皐)의 아들 좌포도대장 임태영(任泰瑛)이 주동이 되어 조정의 명령도 없이 우포도대장과 짜고 사사로이 일으켰는데, 포도대장의 탐욕과 천주교에 대한 개인적 적개심, 포졸들을 먹여 살릴 경제적 방편 등이 그 주된 원인이었다.

임술민란
(壬戌民亂)

1862년
철종 13년

◈ 삼남 약 71개 지역에서 일어난 농민항쟁.
 중세 조선 사회 해체기에 사회모순이 전면화되는 상황에서 일어난 농민항쟁이다. 임술민란에서 농민들은 중세적인 조세제도를 철폐 또는 시정할 것을 요구하였으며, 수령·관속에 대한 공격과 읍권 장악을 통해 무너져가는 중세적인 통치질서를 부정하였다.

 

 

 

조선조의 간지 관련 사건[3] - 연대순 [구한말]

 

 

간지 관련 사건

사건 개요

병인박해
(丙寅迫害)
1866년
고종 3년

◈ 가톨릭교를 서학(西學)·사학(邪學)이라 배척하여 가톨릭교 탄압의 교령(敎令)을 포고해 프랑스 선교사 12명 중 9명을 학살하고 수개월 사이에 국내 신도 8,000여 명을 학살한 흥선대원군의 가톨릭교도 대량 학살 사건.
 병인양요(丙寅洋擾)의 발단이 된다.

병인양요
(丙寅洋擾)

1866년
고종 3년

◈ 대원군의 천주교도 학살·탄압에 대항하여 프랑스함대가 강화도에 침범한 사건.  병인박해 때 조선을 탈출한 프랑스 리델 신부는, 중국 톈진[天津]에 주둔한 프랑스 인도차이나함대 사령관 로즈 제독에게 한국에서 일어난 천주교도 학살사건을 알렸고, 그 후 프랑스 군대는 강화성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무기·서적·양식 등을 약탈하였다. 결국 프랑스가 물러간 후 대원군은 전국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우는 등 쇄국양이(鎖國攘夷) 정책을 더욱 굳히고, 천주교 박해에도 박차를 가하였다.

신미양요
(辛未洋擾)

1871년
고종 8년

◈ 미국이 1866년의 제너럴셔먼호(號) 사건을 빌미로 조선을 개항시키려고 무력 침략한 사건.
 당시 대(對)아시아팽창주의정책을 추진한 미국은 66년 8월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계기로 두 차례 탐문항행을 실시하면서 셔먼호사건에 대한 응징과 조선과의 통상관계 수립을 목적으로 71년 조선을 침략하였다. 하지만 미국의 아시아함대는 조선에서 아무런 성과없이 일본으로 철수하였고 이 사건을 계기로 흥선대원군은 서울의 종로와 전국 각지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워 쇄국정책을 더욱 강화하였다.

병자조약
(丙子條約)

1876년
고종 13년

◈ 조선과 일본간에 체결된 조선의 개항을 유도한 불평등 조약. 속칭 병자수호조약(丙子修好條約), 한·일수호조약(韓日修好條約),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이라고도 한다. 
 일본 군함 운요호[雲揚號]사건을 계기로 이루어진 강화도조약은 조선과 일본이 국제법적인 토대 위에서 외교관계가 성립된 것이지만 일본의 강압에 의한 조약으로 조선은 문호를 개방하는 시발점이 되었고, 서구 제국주의 열강의 침탈을 당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임오군란
(壬午軍亂)

1882년
고종 19년

◈ 임오년 6월 일본식 군제(軍制) 도입과 민씨정권에 대한 반항으로 일어난 구식군대의 군변(軍變).
 강화도조약 체결 이후 정권은 대원군을 중심으로 하는 수구파(守舊派)와 국왕과 명성황후측의 척족(戚族)을 중심으로 하는 개화파(開化派)로 양분, 대립하게 되었으며 외교노선은 민씨정권이 추진한 문호개방정책에 따라 일본을 비롯한 구미제국(歐美諸國)과의 통상관계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개화파와 수구파의 반목은 더욱 심해졌으며 보수적인 입장에 있는 백성들을 도외시함으로써 사회적 혼란과 불안은 거듭되었다. 군변으로 시작한 이 사건이 대외적으로는 청나라와 일본의 조선에 대한 권한을 확대 시켜주는 국제문제로 변하였고 대내적으로는 갑신정변의 바탕을 마련해주었다.

갑신정변
(甲申政變)

1884년
고종 21년

◈ 김옥균(金玉均), 박영효(朴永孝)을 비롯한 급진개화파가 개화사상을 바탕으로 조선의 자주 독립과 근대화를 목표로 일으킨 정변.
 1884년 10월 17일 정변에 성공은 개화파는 새정부를 구성하고 14개조 정강(政綱)을 발표했지만, 명성황후가 청(淸)의 위안스카이[袁世凱(원세개)]에게 원병을 요청해 결국 삼일천하(三日天下)로 막을 내리고 청일 양국은 톈진[天津(천진)]조약을 체결하였다.

갑오개혁
(甲午更張)

1894년
고종 31년

◈ 개화당이 집권한 이후 종래의 문물제도를 근대적 국가형태로 고친 일로 갑오개혁(甲午改革)이라고도 한다.
 갑오농민전쟁이 끝나고 청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로 친일 김홍집 내각이 이루어진 이후 모든 분야의 근대적 개혁을 이룬 것이지만, 일본의 의도로 이루어진 타율적 개혁이었고 이후 러시아와의 대립 속에 을미사변의 씨앗이 되었다.

을미사변
(乙未事變)

1895년
고종 32년

◈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가 주동이 되어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시해하고 일본세력 강화를 획책한 정변.
 청일전쟁 승리 후 주도권을 잡은 일본에 대한 견제로 친러시아 경향에 대한 일본의 야욕적 음모로 벌어진 명성황후 시해사건이다. 이 후 항일의병(抗日義兵) 활동과 고종의 아관파천(俄館播遷)의 계기가 된다.

을미개혁
(乙未改革)

1895년
고종 32년

◈ 을미사변(乙未事變) 직후 성립한 김홍집(金弘集)내각이 실시한 일련의 개혁운동.
 친일개화파의 갑오경장의 후속 개혁 정책으로 태양력의 사용, 군제·교육제도 등의 개혁과 함께 단발령(斷髮令)을 실시하였다.

경자모계사건
(庚子謀計事件)
1900년
광무 4년

◈ 일본에 망명중인 박영효(朴泳孝) 일당이 고종을 폐위하고 새 조각을 위하여 꾸민 음모 사건.

을사늑약
(乙巳勒約)

1905년
(광무 9)

◈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한국 정부를 강압하여 체결한 조약으로 속칭 을사보호조약이라고도 하고 제2차한일협약, 을사오조약(乙巳五條約), 을사조약이라고도 한다.
 을사오적(乙巳五賦)을 필두로 '한국 외교권의 접수, 일본 통감부(統監府)의 설치' 등을 중요내용으로 하는 조약을 외부대신 박제순과 일본공사 하야시 사이에 체결 조인하고 11월 18일에 이를 발표한다. 조약 체결 후 1905년 11월 20일자의 《황성신문(皇城新聞)》에 장지연(張志淵)이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 논설을 싣고 전국에 알려 조약 체결에 대한 거부와 일제에 대한 항쟁이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게 된다.

을사오적
(乙巳五賊)

◈ 을사늑약 체결에 찬성한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 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 학부대신 이완용(李完用), 농상공부대신 권중현(權重顯) 등의 5대신.

정미칠조약(丁未七條約)

1907년
융희 1년

◈ 일본이 한국을 병탄하기 위한 마지막 조치로 강행한 7개항의 조약으로 한일신협약(韓日新協約)이라고도 한다.
 헤이그밀사사건을 계기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킨 일제는 형해화(形骸化)한 대한제국의 국가체제에 마지막 숨통을 죄기 위해 법령제정권·관리임명권·행정권 및 일본관리의 임명 등을 내용으로 한 7개항의 조약안을 제시, 아무런 장애도 없이 1907년 7월 24일 이완용(李完用)과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명의로 체결·조인하였다.

기유각서
(己酉覺書)

1909년
융희 3년

◈ 1909년 7월 12일 한국의 사법권(司法權) 및 감옥사무(監獄事務)의 처리권을 일본정부에 위탁하는 각서로‘한국사법 및 통감사무 위탁에 관한 각서’라고도 한다.
 1907년에 체결한 한일신협약의 세부사항을 시행하기 위해 일본의 강압으로 조인되어 1910년의 경술국치(庚戌國恥)[속칭 한일합방(韓日合邦)]는 요식 행위에 지나지 않게 된다.

경술국치
(庚戌國恥)

1910년
융희 4년

◈ 1910년 10년 8월 22일 일제의 조선 강점의 마지막 단계로 한일합병조약의 체결이 이루어져 일제는 한국식민화 침략을 완성되었다.
 한국위정자들의 무능과 이완용(李完用)을 필두로 한 친일내각, 이용구(李容九)·송병준(宋秉畯) 등으로 대표되는 일진회(一進會) 등 매국노들의 반역행위도 큰 몫을 하였고, 미국·영국 등 제국주위 열강국들의 묵인도 일본에게 도움을 주었다. 일본은 야욕을 달성한 뒤 종래의 통감부(統監府)를 폐지하고 보다 강력한 통치기구인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를 설치하여 같은 해 10월 1일부터 구체적인 한반도의 경영에 들어간다. 한일합방(韓日合邦)이란 용어보다는 우리의 입장에서 사용한 경술국치(庚戌國恥)로 사용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