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 16. 13:09ㆍ고증·참역사연구
신라 왕조 계보와 각 왕조의 역사 연표입니다. (박(朴)씨 10왕, 석(昔)씨 8왕, 김(金)씨 38왕)
1대 박혁거세(朴赫居世, BC69~AD4)-박씨
13세에 왕위에 올라 나라 이름을 서라벌이라함. 왕21년에는 수도를 금성(金城)이라 하고 성을 쌓아 국가의 기초를 세움. BC27년 천일창(天日槍)이 왜(일본)땅으로 가고, 신라의 도공이 왜에 건너가서 신라식 도자기 제작.
2대 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 ?~24)-박씨
박혁거세의 맏아들. 석탈해(昔脫解, 탈해왕)를 사위로삼아 정사를 맏겼다함. 병선 100여척으로 왜구 격퇴.
3대 유리이사금(瑠璃尼師今, ?~57)-박씨
남해왕 아들. 6부(部)의 이름을 고치고 성(姓)을 내렸으며 신라 가악의 기원 인 '도솔가' 등을 지음
4대 탈해이사금(脫解, BC19~80)-석씨
석탈해(昔脫解). 65년 국호를 계림(鷄林)이라 고침. 김알지 탄생.
5대 파사이사금 (婆娑, ?~112)-박씨
유리이사금 아들. 월성을 쌓아 백성을 옮겨살게하고, 여러나라를 병합하여 국위를 떨침.
6대 지마이사금(祗摩, ?)-박씨
파사왕의 맏아들. 백제의 협조로 말갈을 물리쳤음. 지미왕(祗味)
7대 일성이사금(逸聖, ?)-박씨
아버지는 유리왕의 형. 농본정책으로 경지를 개간하고 백성의 사치를 금함.
8대 아달라이사금(阿達羅, ?~184)-박씨
원명은 아달라이사금(阿達羅尼師今). 현(縣)의 설치와 도로개통등 내치에 힘씀.
9대 벌휴이사금(伐休, ?~196)-석씨
탈해왕의 손자
10대 나해이사금(奈解, ?~230)-석씨
벌휴왕의 손자.
11대 조분이사금(助賁, ?~247)-석씨
제귀왕(諸貴). 벌휴왕의 손자.
12대 첨해이사금(沾解, ?~261)-석씨
벌휴왕의 손자, 조분왕의 동생. 고구려와 국교를 통함.
13대 미추이사금(味鄒, ?~284)-김씨
김씨 왕가의 시조
14대 유례이사금(儒禮, ?~298)-석씨
조분왕의 맏아들. 백제와 수교함.
15대 기림이사금(基臨, 289~310)-석씨
조분왕의 둘째아들. 307년에 국호를 신라로 고침.
16대 흘해이사금(訖解, ?~356)-석씨
기림왕이 후사가 없이죽자 군신들의 추대로 즉위함.
17대 내물마립간(柰勿麻立干, ?~402)-김씨
중국 문물 수입에 힘씀. 나밀왕(那密)이라고도 함.
18대 실성마립간(實聖, ?~417)-계속 김씨 왕조
내물왕이 죽은 후 백성들의 추대로 즉위. 내물왕의 태자 눌지를 시기하여 죽이려다 도리어 피살됨.
19대 눌지마립간(訥祗, ?~458)
내물왕의 아들. 실성왕의 사위. 438년 우차법(牛車法)을 제정하였다.
458년 고구려의 묵호자(墨胡子)가 불교를 전파.
20대 자비마립간(慈悲, ?~479)
왕17년에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하자 나제동맹을 맺음.
21대 소지마립간(炤知, ?)
22대 지증왕(智證, 437~514)
휘는 지대로(智大路). 왕이라는 칭호를 처음 사용함.
이사부(異斯夫)가 우산국(于山國, 울릉도)을 점령함.
23대 법흥왕(法興, ?)
휘는 원종(原宗). 514년 아시촌(阿尸村)에 소경(小京) 설치. 율령(律令) 반포.
52년 이차돈(異次頓) 순교. 532년 금관가야 멸망시킴.
536년 처음으로 연호를 건원(建元)이라함.
휘는 삼맥종(三麥宗). 황룡사(皇龍寺) 건립을 시작.
555년 북한산 진흥왕순수비, 561년 창녕 진흥왕순수비,
568년 황초령 진흥왕순수비와 마운령 진흥왕순수비 건립.
562 대가야 멸망시킴
25대 진지왕(眞智, ?)
휘는 사륜(舍輪)
26대 진평왕(眞平, ?~632)
휘는 백정(白淨)
27대 선덕여왕(善德, ?)
휘는 덕만(德曼). 진평왕 맏딸. 614년 경주 첨성대 건립.
28대 진덕여왕(眞德, ?~654)
휘는 승만(勝蔓)
29대 무열왕(武烈, 604~661)
휘는 춘추(春秋). 태종무열왕(太宗武烈). 백제를 멸망시킴.
30대 문무왕(文武, ?~681)
휘는 법민(法敏) 왕17년에 백제,고구려를 멸망시켜 삼국통일.
유언에 따라 동해 대왕암에 수장함.
667년 김유신과 함께 고구려 정벌에 나섬. 김유신(575~673) 죽음.
31대 신문왕(神文, ?~692)
휘는 정명,명지(政明,明之). 문무왕의 아들. 만파식적을 만듬.
32대 효소왕(孝昭, 643~702)
휘는 이홍(理洪),이공(理恭). 신문왕의 맏아들. 692년 설총이 이두(吏讀)를 정리.
33대 성덕왕(聖德, ?~737)
휘는 흥광(興光). 723년 혜초가 서역(西域)에서 돌아와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을 저술.
34대 효성왕(孝成, ?~742)
휘는 승경(承慶). 성덕왕의 둘째 아들
35대 경덕왕(景德, ?~765)
휘는 현영(憲英). 751년 대상(大相) 김대성(金大成)이 불국사(佛國寺) 창건.
36대 혜공왕(惠恭, 765~780)
휘는 건운(乾運). 경덕왕의 아들. 8세에 즉위하여 여자 놀이를 하며 여자처럼 행동을 함.
대공의 난, 김지정의 난 등으로 나라가 어지러웠으며 선덕왕에게 피살됨.
770년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 주조.
37대 선덕왕(宣德, ?~785)
휘는 양상(良相). 내물왕의 10세손
38대 원성왕(元聖, ?~798)
휘는 경신(敬信). 김주원이 냇물이 넘쳐 궁에 못들어가자 먼저 궁에 들어가 왕이됨.
788년 처음으로 독서출신과(讀書出身科)를 설치.
39대 소성왕(昭聖, ?~800)
휘는 준옹(俊邕). 원성왕의 태자인 인겸(仁謙) 의 아들. 2년만에 죽자 이후에 왕위 쟁탈전이 벌어 졌음.
40대 애장왕(哀莊, 788~809)
13세에 즉위. 섭정하던 숙부 김언승(金彦昇)에게 왕위 빼앗기고 시해됨. 해인사 창건.
41대 헌덕왕(憲德, ?~826)
휘는 언승(彦昇). 조카를 죽이고 왕이됨. 친당정책. 백영(白永)에 명하여 패강(浿江)에 300리나 되는 장성을 쌓음.
42대 흥덕왕(興德, ?~836)
휘는 수종(秀宗), 경휘(景徽). 원성 왕의 손자며 헌덕왕의 아우.
828년 완도에 청해진을 만들어 장보고(長保皐)에게 관리토록 함.
능은 경북 경주 안강읍 육통리(사적 제30호)
43대 희강왕(僖康, ?~838)
휘는 제륭(悌隆), 원성왕의 손자. 흥덕왕이 후사없이 죽자, 삼촌인 균정(均貞)을 죽인후 왕위에 올랐으나, 그를 도운 김명(金明)등이 난을 일으키자 자살함.
44대 민애왕(閔哀, ?~839)
김명(金明). 시중으로 있을 때 흥덕왕이 죽자, 김제륭을 왕으로 내세우고 스스로 상대등이 되었다가 흥강왕을 죽게하고 왕이됨.
45대 신무왕(神武, ?~839)
휘는 우징(祐徵). 민애왕을 죽이고 왕이 되었으나, 수개월 뒤 반대파인 죽은 이홍(利弘)의 저주를 받아 죽었다함.
46대 문성왕(文聖, ?)
휘는 경응(慶膺). 신무왕의 태자. 846년 장보고 반란, 염장(閻長)에게 피살됨.
47대 헌안왕(憲安, ?~861)
휘는 의정(誼靖). 후사가 없어 왕족 응렴(膺廉)을 사위 삼고 왕위를 물려줌.
48대 경문왕(景文, ?~875)
휘는 응렴(膺廉)
49대 헌강왕(憲康, ?~886)
휘는 정(晸). 처용무가 유행하고, 사회가 사치와 환락에 빠져듬.
50대 정강왕(定康, ?~887)
휘는 황(晃). 경문왕의 둘째 아들로 진성여왕의 오빠. 몸이 약해서 즉위 2년만에 죽음
51대 진성여왕(眞聖, ?~897)
휘는 만(曼). 음행(淫行)을 일삼고 병제(兵制)가 퇴폐하여 나라가 혼란에 빠짐
52대 효공왕(孝恭, ?~912)
휘는 요(嶢). 정강왕의 아들. 궁예와 견훤에게 많은 영토를 빼앗기고 정사를 돌보지 않아 후삼국이 정립되는 것을 막지 못함.
53대 신덕왕(神德, ?~917)-박씨
휘는 경휘(景暉). 효공왕이 후사가 없이 죽자, 백성의 추대를 받아 즉위함
54대 경명왕(景明, ?~924)-박씨
휘는 승영(昇英). 신덕왕의 태자. 즉위 후 쇠퇴한 국운을 건지려 후당(後唐)에 구원을 청하였으나 실패.
55대 경애왕(景哀, ?~927)-박씨
휘는 위응(魏膺). 927년 포석정에서 연회를 하다가 견훤의 습격을 받자 자살함.
56대 경순왕(敬順, ?~978)
신라 마지막 왕
휘는 부(傅). 경애왕이 죽은후 견훤에 의하여 즉위 하였으나, 935년에 왕건에 귀의하여 왕건의 딸 낙랑공주와 결혼하여 경주 사심관(事審官)으로 여생을 보냄.
36대 해공왕 때 왕을 살해하고 스스로 왕위에 오른 김양상의 반란 이후, 극심한 왕위 찬탈 분쟁과 누적된 신분제에 대한 반발로 잦은 내란이 일기 시작했다. 또한 지나친 불교 숭상으로 잦은 불사와 불로소득의 각종 혜택이 주어지는 승려가 양산되어 국운이 기운데다, 51대 진성여왕에 이르러 왕의 황읨과 지도층의 실정으로 극도의 혼란기에 접어들었다. 그리하여 궁예가 동북부를 차지하고 국호를 후고구려라 칭하고, 견훤은 전라도와 경상도 일부를 취하여 완산주(전주)에 도읍을 정하고 후백제라 칭하였다. 후고구려의 왕건이 궁예를 무너뜨리고 고려를 세운 뒤 국력이 자못 왕성하니 신라 경명왕은 사절을 보내어 수교를 청하기에 이르렀다. 927년 신라 경애왕 4년, 후백제의 견훤이 군사를 이끌고 서라벌로 진격하였다. 포석사에서 제물을 차리고 백관을 거느린 채 국가안위 천수 제례를 올리던 경애왕은 견훤에게 사로잡혀 자진하는 수모를 당하였고, 견훤은 왕제 김부를 경순왕으로 세웠다. 그러나 왕건이 견훤과 싸워 대승하여 후백제를 함락하고 국세가 팽창하니, 위협을 느낀 신라는 군신회의를 열어 고려에 나라를 넘겨주기로 가결하였다. 이로써 992년간 56명의 왕이 다스렸던 신라는 마침내 찬란한 문화를 남기고 역사 속에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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