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4. 4. 11:07ㆍ가인풍수지리·음택과양택
풍수지리학의 본질인 동기감응론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은 조선 시대에도 뜨거웠다.
『조성왕조실록』에서 풍수학에 관해 발췌한 글을 정리하면, 세종 대왕이 가장 동기감응론을 믿지 않으셨던 분이다.
본래 세종의 릉은 서울 내곡동의 헌릉(태종의 능) 옆에 점지(點地)했는데, 이 자리를 두고 지관들이 물이 찬다며 다른 곳을 추천하였다. 그러자 세종은, "다른 곳에 복지를 얻는 것이 선영 곁에 장사하는 것만 하겠느냐?"하며 묵살하고 결국 그 자리에 능을 마련했다. 그러나 묘 바람은 무서웠다.
예종 1년에 여주로 옮기려고 광중을 파니, 19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시신은 물론 삼베 옷 하나 썩지 않았다고 한다. 광중에 물이 차면 겨울에는 꽁꽁 얼고 여름에는 싸늘한 물 속에 시신이 잠겨 도무지 썩지 않는다.
심지어 물에 둥둥 떠다니던 시신이 엎어지는 경우도 있고, 혹은 떨어진 얼굴이 다리 사이에 꼬여 있기도 한다.
그럼 세종의 시신이 썩지 않는 19년 동안 후손에겐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세종을 이어 등극한 문종은 재위 2년만에 종기로 승하하고, 단종은 재위 3년 후에 사약을 받고, 세조는 재위 13년만에 지병으로 죽고, 예종은 1년만에 승하했으니 19년 동안에 무려 4명의 임금이 바뀐 셈이다.
그러나 여주로 릉을 옮긴 뒤에 등극한 성종은 25년 간이나 집권하며 많은 치적을 남겼다.
또 여러 실학자들은 조상을 길지에 모시면 후손이 복을 받는다는 사상의 신비성을 들어 동기감응론을 부정하였다. 그 중에서 정약용은, "살아계신 부모님이 자식 잘되라고 그 자식과 마주앉아 두 손 잡고 훈계해도 어긋나기가 쉬운데, 하물며 죽은 사람이 어찌 살아있는 아들에게 복을 줄 수 있는가."라 했고, 홍대용은 "중형을 당하여 옥에 갇힌 죄수가 옥에서 당하는 고초가 뼈를 깎는 것일 터인데도, 그 죄수의 아들이 아비가 받는 악형 때문에 몸에 악질이 들었다는 말을 듣지 못했거늘, 하물며 죽은 자의 혼백에 있어서랴. 어찌 죽은 아비가 산 아들에게 복을 내릴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하지만 실학자들이 동기감응론을 비판한 배경에는 당시 그들이 처한 사회적 입장과 현실개혁 의지를 관찰할 필요가 있다. 두 사람 모두 죄인과 야인의 입장에서 사회체제에 대해 심한 불만을 품고서 기존의 틀을 바꿔보자는 진보적인 주장을 하였다.
그 중에서 풍수학에 대한 견해는 풍수학에 해박한 지식을 가져서가 아니라 사대부에 대한 반감의 발로로 보아야 할 것이다. 즉, 큰 공적도 없으면서 부귀영화에 빠진 권력자들이 지관을 들여 묘터를 잡는 꼴이 혁신적 사고를 가진 그들에게 곱게 보였을 리 만무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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