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소 잔듸까는 유래
2010. 4. 4. 12:01ㆍ가인풍수지리·음택과양택
상고시대에는 시신을 그냥 산야에 버리거나 초목으로 덮는 정도였습니다. 그러다가 점차 인지가 발달하면서 땅에 구덩이를 파 시신을 넣고 평평하게 하여 무덤(墓)을 만들어 썼습니다. 그러나 평평한 형태의 묘는 시간이 지날수록 그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 뿐만 아니라 짐승들이 파헤쳐 시신을 범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사람들은 시신을 짐승들로부터 보호하고 쉽게 찾을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묘를 생각하게 되었고 이에 시신을 흙으로 묻고 봉토를 한 무덤(墳)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분(墳)은 글자에서 보듯 흙과 조개껍질을 수북이 쌓아 봉분을 높인 형태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 오늘날 무덤은 들에 시신을 버리는 것과 같은 장(葬)의 형태에서 봉분이 없는 평지묘(平地墓)로, 다시 봉분을 한 분(墳)으로 발전한 것입니다. 즉 무덤의 역사는 장(葬)→묘(墓)→분(墳)의 형태로 변천·발전한 것입니다.
처음에는 흙과 조개껍질로 쌓았던 봉분은, 농경사회로 정착됨에 따라 조개껍질 대신 곡물의 짚 등을 덮어 빗물 등으로 인한 봉분의 훼손(붕괴)을 막았다가, 자연히 생겨 자라는 잔디(떼, 사초)가 봉분을 보호한다는 것을 안 다음 부터 떼를 입힌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농경생활이 정착된 신석기 이후 부터 잔디를 심게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참고로 20여년 전, 서해안 섬(선유도)에서 봉분모양의 짚더미를 본 적이 있습니다. 초가집 지붕 형태의 짚더미 밑에 대나무로 엮은 관속에 시신을 안치한 후 삼년 정도 되어 육탈이 되면 뼈만 땅 속에 묻는 특이한 매장 풍습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시신을 짐승들로부터 보호하고 쉽게 찾을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묘를 생각하게 되었고 이에 시신을 흙으로 묻고 봉토를 한 무덤(墳)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분(墳)은 글자에서 보듯 흙과 조개껍질을 수북이 쌓아 봉분을 높인 형태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 오늘날 무덤은 들에 시신을 버리는 것과 같은 장(葬)의 형태에서 봉분이 없는 평지묘(平地墓)로, 다시 봉분을 한 분(墳)으로 발전한 것입니다. 즉 무덤의 역사는 장(葬)→묘(墓)→분(墳)의 형태로 변천·발전한 것입니다.
처음에는 흙과 조개껍질로 쌓았던 봉분은, 농경사회로 정착됨에 따라 조개껍질 대신 곡물의 짚 등을 덮어 빗물 등으로 인한 봉분의 훼손(붕괴)을 막았다가, 자연히 생겨 자라는 잔디(떼, 사초)가 봉분을 보호한다는 것을 안 다음 부터 떼를 입힌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농경생활이 정착된 신석기 이후 부터 잔디를 심게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참고로 20여년 전, 서해안 섬(선유도)에서 봉분모양의 짚더미를 본 적이 있습니다. 초가집 지붕 형태의 짚더미 밑에 대나무로 엮은 관속에 시신을 안치한 후 삼년 정도 되어 육탈이 되면 뼈만 땅 속에 묻는 특이한 매장 풍습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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