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허구에 입히다
2008. 2. 8. 21:35ㆍ이야기·미스터리·히스토리
상상과 허구의 즐거움을 역사에 입히다
연산군의 어머니 윤씨는 남편인 성종이 어을우동과 바람을 피워 폐비가 되었다. (드라마 ‘왕과 나’)
세종대왕은 어릴 적 고려 복위운동 세력에 의해 납치되었다. (드라마 ‘대왕세종’)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가 결혼해 아이를 낳았고 그 자손이 지금도 살아 있다. (소설 ‘다빈치 코드’)
조선시대 화가 신윤복은 남자가 아니라 여자였다. (소설 ‘바람의 화원’)
기존의 역사적 사실, 혹은 정설과 다른 ‘황당한’ 이야기들이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다. 이른바 팩션(Faction)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통해서다. 팩션은 팩트(Fact)와 픽션(Fiction)을 붙여 만든 신조어. 말 그대로 사실에 허구를 결합해 새로운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이다.
팩션은 요즘 문화계의 가장 강력하고 광범위한 코드다. 소설, 영화, 드라마 가리지 않고 팩션 작품들이 넘쳐난다. 드라마만 해도 인기리에 방송중인 ‘이산’을 비롯해 ‘왕과 나’ 최근 시작한 ‘대왕세종’이 전부 팩션이다. 그 뒤를 이어 신윤복과 김홍도를 주인공으로 한 베스트셀러 소설 원작의 ‘바람의 화원’, 고구려 대무신왕의 이야기 ‘바람의 나라’ 등 팩션작품들도 줄줄이 대기 중이다. 장르를 가리지 않는 팩션의 인기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팩션을 즐긴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팩션은 역사물을 좋아하는 중년 남성층을 정점으로 갈수록 젊은층과 여성층 소비가 늘고 있다.
하지만 팩션이란 말 자체는 아직 낯설다. 팩션이 처음부터 팩션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것도 아니고 그 전부터 역사소설과 사극이 큰 인기를 얻고 있어 굳이 새 용어가 필요하지 않았던 탓도 있다.
그러나 팩션은 엄밀히 말해 정통 역사소설이나 사극과 다르다. 정통 역사소설이나 사극도 극적 전개를 위해 일정 정도 작가의 상상력이 동원되긴 하지만 그 역할은 어디까지나 사실의 보완에 그친다. 반면 팩션은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이 소재가 되어 작가가 지어내려는 허구를 보완한다.
사실과 허구가 빚어내는 이질적인 즐거움
이제까지의 이야기들은 팩트 아니면 픽션이었다. 팩트는 참이고 픽션은 거짓이라는 이분법은 오랫동안 깨지지 않는 구도를 유지해왔다. 하지만 팩션은 사실과 허구라는 서로 상충되는 개념을 한 작품 안에서 엮어내고 녹여낸다. 그럼으로써 논픽션이나 픽션이 줄 수 없는 색다른 재미와 즐겨움을 선사한다.
팩션의 팩트는 독자와 관객에게 익숙함을 제공한다. 세종대왕(드라마 ‘대왕세종’)이나 정조(드라마 ‘이산’) 연산군(영화 ‘왕의 남자’) 이순신(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같은 역사적 인물은 현대인들에게 어떤 의미에서 연예인이나 마찬가지다. 너무나 잘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잘 알지 못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역사 속 유명인에 대한 이야기는 교과서를 통해 이미 알고 있는 것이면서도 언제 들어도 관심이 간다.
반면 팩션의 픽션은 즐거움을 선사한다. 연예인의 가십처럼 내가 잘 알고 있는 인물의 알려지지 않는 이야기는 사소한 것이라도 흥미롭다.
그것이 비록 허구라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혹 그럴 수도 있지 않았을까?’ 또는 ‘만일 그 사람이 이랬다면 그 후 역사가 어떻게 달라졌을까?’라고 상상해보는 것만으로도 나름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어차피 역사란 기록한 자의 뜻대로 남는 것이고 보면 후일 그 역사를 읽는 사람들에게도 저마다의 견해와 바람이 있을 터. 영웅호걸에게도 첫사랑의 설레임이나 윗사람과의 갈등 같은 인간적인 면모를 기대하는 것 역시 인지상정이다. 그런 의미에서 팩션의 허구는 그것이 만들어지는 시점에서 가장 보편적인 다수의 바람을 충족시키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동시에 허구는 독자나 관객으로 하여금 인간의 삶이란 과거나 현재나, 혹은 왕이나 백성이나 크게 다를 바 없다는 진리를 새삼 깨닫게 하기도 한다.
미지의 과거로 떠나는 지적여행
알고 있는 것의 수준도 얕아 과거의 어느 한자락을 세세히 혹은 생생하게 펼쳐 보이면 눈길이 갈 수 밖에 없다. 안다고 생각했던 것의 주변부나 이면을 보여 준다면 더욱 알고 싶어 진다.
한편 과거는 언제나 그 흔적을 남긴다. 기록이 쓴 사람의 의도가 반영되어 있다면 유물이나 제도는 그 자체로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연결고리가 된다. 따라서 지금까지 남아있는 물건이나 제도를 거슬러 올라가는 일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흥미로운 여행이자 지적 유희가 된다. 이 지적 호기심을 자연스레 자극하고 적당한 흥미와 함께 충족시켜주는 것이 팩션이 또다른 인기 비결이다.
드라마 ‘대장금’에서 과거는 궁중음식과 의술을 통해 살아난다. 왕실과 조정이 등장하긴 하지만 주인공은 왕과 신하가 아니라 이제까지 들러리에 불과했던 상궁 나인과 의녀다.
왕의 방 앞에서 누가 왔다고 고하거나 궁중 후원을 거닐 때 머리를숙인 채 따라다니기만 했던 궁녀들에게도 희노애락과 나름의 전문성이 있다는 사실은 새로운 발견이었으며 그들이 만들어내는 형형색색 궁중음식과 신비한 의술은 장금의 인생만큼이나 흥미롭기만 했다.
전복과 역설의 매력
팩션의 가정은 사료를 인용해가며 처음부터 끝까지 엄숙한 정통 역사소설이나 사극과 달리 때로 유쾌하고 때로 삐딱하기까지 하다. 이제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실 혹은 거부할 수 없다고 믿는 명제들을 뒤집어 엎음으로써 충격을 안기고 논란을 만들어낸다. 지은이의 주장에 찬성하든 반대하든, 사람들은 그 과정에서 흔들리는 절대명제를 지켜보는 것부터 전복자에 대한 심정적 지지나 분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감정을 경험한다. 그 이야기를 둘러싼 사회적 논란이 거세면 거셀수록 거기에 동참하고픈 욕구 또한 커질 수 밖에 없다.
팩션 붐의 진원이 된 소설 ‘다빈치 코드’는 이념을 넘어 종교의 문제를 건드렸다. 작가는 신약성서를 통해 지난 2000년 동안 절대진리 혹은 부정할 수 없는 가치로 여겨졌던 예수의 부활에 과감하게 펜을 들이댔다. 예수는 부활한 것이 아니라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해 자식을 두었고 그 혈통이 비밀결사에 의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예수가 최후의 만찬에서사용했다는 성배는 막달라 마리아의 은유라는 주장이다. 그리고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이라는 물증까지 제시했다. 기독교 신자의 입장에서는 아무리 팩션이라고 해도 자신들의 근간을 뒤흔드는 위험한 주장이 아닐 수 없었다. 실제 국내외 보수기독교 단체들은 댄 브라운의 책은 물론 톰 행크스 주연의 영화에 대해서도 거세게 항의했다. 그러나 바로 그 기존의 절대가치를 뒤엎는 과감함과 선정성 덕분에 다빈치 코드는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었다.
소설과 하반기 드라마로도 만들어질 ‘바람의 화원’은 조선후기 풍속화로 유명한 신윤복이 실은 여자였다는 파격적인 주장을 편다. 비록 ‘미인도’를 비롯한 그의 그림이 당대 또 한명의 걸출한 화가인 김홍도와 비교해 여성적인 풍미가 물씬하다고는 하지만 신윤복이 남자라는 것은 일반인들에게는 상식. 하지만 사실 신윤복에 대한 기록은 김홍도와 달리 몇줄 뿐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작가는 여기서 상상력을 발휘해 한량과 기녀가 주로 등장하는 그의 여성스런 화풍이 실은 그가 여자였기에 가능했다는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남장여자라는 언제 들어도 흥미로운 소재에 신윤복이 남겨놓은 그림이 지은이의 주장을 뒷받침하면서 이 새로운 주장은 독자들의 공감을 얻어낼 수 있었다.
정보의 검색과 통합이 만들어낸 새로운 스토리텔링
그러나 인터넷에서의 정보 검색과 통합이 그러하듯 팩션 역시 정보의 신빙성이 관건이다. 팩션은 그 장르적 특성상 애초부터 역사를 왜곡한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원균을 지나치게 호의적으로 그렸다는 비판이 거셌고 영화 ‘왕의 남자’에서도 연산군과 공길의 동성애 코드가 논란을 빚은 바 있다.
이에 대해 김기봉 경기대 사학과 교수는 최근 ‘문학동네’ 겨울호 기고에서 “역사가의 역사서술과 역사소설, 역사드라마는 엄연히 차이가 있다”고 전제한 뒤 “역사가는 사료 부족으로 불분명한 역사적 사실을 추론할 목적으로 역사적 상상력을발휘하지만, 역사소설가와 사극제작자는 역사적 상상력을 펼칠 목적으로 사료를 이용한다”고 말한 바 있다. 팩션 작가들 역시 역사왜곡 논란이 일 때마다 같은 요지의 주장을 편다.
문제는 팩션이 다루는 사실과 허구의 관계다. 드라마 ‘왕과 나’의 주인공인 내시 김처선은 실존 인물이지만 기록에 의하면 문종 때 내시가 되었다. 하지만 드라마에서는 한참 어린 성종과 비슷한 연배로 사랑하는 여인이 왕의 후궁이 되자 스스로 양물을 자르고 내시가 된 것으로 나온다.
이런 설정이라면 그 내시가 굳이 김처선일 필요가 있을까? 한편 ‘이산’에서도 조선왕조실록에 영조 사후 즉위했다고 기록된 정조가 영조로부터 양위를 받는 것으로 그려진다. 사소하지만, 불필요한 역사왜곡이 아닐 수 없다.
이밖에 드라마 ‘대조영’은 생몰연대가 다른 설인귀와 측천무후가 동시대인으로 등장했고 ‘주몽’에서도 부여가 기록과 달리 작은 나라로 설정되는 등 사실이 허구를 위해 둔갑하는 크고 작은 사례가 적지 않다.
아무리 팩션이라 하더라도 사실은 사실 그대로 다루되 거기에 작가의 새로운 해석이나 적절한 허구가 결합되어 그 자체로개연성과 설득력을 가질 때만이 듣는 사람을 빨아들이는 재미난 이야기가 된다. 단순히 극적 재미만을 위해 기록을 무시하거나 아무 연관없는 인물들을 엮거나 시대를 건너 뛰는 등 거짓을 동원한다면 ‘뻥사극’이라는 비아냥을 면키 어렵다. 팩션도 팩트와 픽션간의 긴장감을 유지해야만 이야기로써 생명력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팩션 작가들이 반드시 명심해야 할 팩트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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