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6. 26. 17:08ㆍ가인(稼印)역학연구원
천존지비(天尊地卑) 일고(一考)
조선일보를 보니 문중의 80%가 여자후손의 이름도 족보에 함께 올리고 있다는 기사가 실렸다.
이는 그동안 유교적인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우리의 정신문화에 큰 영향을 끼치는 사건들로, 문중 어르신들의 시대에 따른 순류각성(順流覺醒)에서 나타난 당연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지난 500년간 우리의 정신세계를 지배하여 왔던 유교적 윤리관은 마침내 현대에 이르러 실질적인 붕괴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원래 유교에서는 정명(正名) 사상이 있었다. 공자선생은 춘추전국 시대를 살아가면서 제자들이 "대권을 잡으면 가장 먼저 무엇을 하 시겠느냐?"라고 묻자 "나는 정명(正名)을 하겠다."라고 주장하였다.
사물의 개념과 정의를 명백하게 하여 혼란을 바로잡는 출발점으로 삼겠다고 한 것은 대단히 깊이있는 통찰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문제는 정명(正名)을 하려다보니 최초 출발인 음양부터 하늘은 높고, 땅은 낮다는 개념을 규정하지 아니할 수 없게 되었는데, 이때 하늘은 존(尊)이라는 글을 쓰고, 땅은 비(卑)라는 글자를 쓴 것이 화근이었다.
제대로 쓰려면 그냥 공간적 개념인 천고(天高), 지저(地低)라고 썼어야 하는데, 여기에 감정이 개입되어 존비라는 글자로 천지를 규정하다보니, 그 이후 양(陽)의 대표적인 인격체인 남자는 존귀하게 표현이 되었고, 음(陰)의 대표적인 인격체인 여자는 비천하게 표현이 된 것이다.
이것은 유교적 정명(正名)사상의 결정적 실수였으며 역사를 뒤바꾼 크나큰 왜곡이었다. 어쩌면 공자선생이 천존지비라고 하는 것을 정리하기까지는 아마도 자신이 제사상에 육포를 올리지 않았다는 단순한 이유로 조강지처를 버리고, 그 아들 백어(伯魚)가 처를 소박 맞힌 것이라든지, 그 손자인 자사(子思)까지 3대에 걸쳐 처를 버린 자신 집안의 비리(?)를 은폐내지는 정당화 하기 위해서 여성의 지위를 낮춰야 할 필요성에서였는지도 모르겠다.
예기(禮記)에 보면 나와있는 무수히 많은 예법들에 대한 규정들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예법들 역시 모두 다 저 존비사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지난 수천년간 동서양의 곳곳에서 여성들이 품었던 한이 얼마나 많았는가? 나는 여성 옹호론자는 아니지만, 여성들의 지위가 최소한 남자와 동등한 지위를 획득되어야 한다고 보는 사람이다.
일음일양(一陰一陽)을 도(道)라고 한다고 하였다. 음양은 결코 어느 하나가 귀하고 또 다른 하나는 천박한 것이 아니다. 음과 양은 동등한 것이며, 또 어느 하나만 있어서는 결코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이 바로 이 태극(太極)세상인 것이다.
족보에 여성의 이름을 올리기 시작한 문중 어르신들의 결정은 참으로 시대에 부합되는 귀중한 결정이 아닐 수 없다. 앞으로 과학이 발전하면 할 수록 더욱 더 여성의 지위는 향상이 될 것이며, 삼천양지(三天兩地)의 시대를 접고 삼지양천(三地兩天) 운동이 시작되면 이같은 기운은 더욱 거세어 질 것이다.
유교적 사상이 살아남으려면 천존지비라는 저 글자부터 빨리 띁어고쳐야만 할 것이다. 일음일양지위도(一陰一陽之謂道)요, 음양평등(陰陽平等)이 진실로 진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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