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순국 100년> 부활하는 `동양평화론'

2010. 3. 21. 10:48고증·참역사연구

<안중근순국 100년> 부활하는 `동양평화론'

 

일회성 기념행사 지양..평화사상 계승해야
31살의 젊은 나이에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간 안중근 의사를 보듬은 곳은 고국 땅이 아니었다.

오는 26일로 순국 100주년을 맞지만 그의 영혼은 여전히 이국 땅 중국의 뤼순 감옥 부근 구천을 떠돌고 있다.

하얼빈 역에서 의거를 일으키고 일제에 체포돼 창춘(長春)을 거쳐 랴오닝(遼寧)반도 남단의 철옹성인 뤼순(旅順)감옥에서 생을 마감한 그의 시신이 온전히 수습되지 못했던 탓이다.

그를 처형한 일제는 시신을 유족에게 인계하지 않았다. 이승과 고별하는 그의 육신에게조차 안식을 허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뤼순감옥에서 형이 집행됐지만 지금껏 어디에 묻혔는지도 정확히 확인되지 않았다.
감옥 북쪽의 야산 어딘가에 묻었다는 당시 일제 간수들의 증언에 따라 2년 전 보훈처가 유해 발굴을 시도했지만 찾을 수는 없었다.

이 일대는 이미 20층 이상의 고층 건물들이 빼곡히 들어선 개발지역으로 변모했다. 그의 유해를 찾을 길이 사실상 영영 사라진 것이다.

5m 높이의 붉은 장벽에 갇혀 그가 삶을 마감할 때까지 4개월여를 머물렀던 뤼순 감옥에서야 겨우 그의 숨결과 체취를 느낄 수 있을 뿐이다.

뤼순 감옥이 그대로 보존돼 있다는 것이 그나마 위안거리다.
열강의 식민지 쟁탈이 치열했던 1900년대 제국주의 러시아가 먼저 세우고 이어 일제가 정치범 수용소로 삼았던 뤼순 감옥이 조국 독립을 위해 기꺼이 몸바쳤던 '열혈 청년' 안중근을 추모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으로 남았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이기도 하다.

일제에 앞서 청나라를 차지했던 러시아가 1902년 85칸 감방을 갖춘 뤼순 감옥을 세웠고, 이후 러일전쟁 승리로 드넓은 만주 땅을 모두 차지한 일제는 이 감옥을 증축해 항일운동가들을 가두고 탄압하는 데 이용했다.

안 의사가 그렇게 희생됐고 단재 신채호 선생, 우당 이회영 선생 등 11명의 독립투사가 이곳에서 고초를 겪다 생을 마감했다.

굴곡진 역사를 간직한 뤼순감옥은 안식하지 못하는 항일 운동가 영혼들의 고통스러운 외침이 들리는 듯 지금도 여전히 음산하다.

감옥 문을 들어서면 붉은 벽돌로 세워진 일본식 본관 건물을 중심으로 좌우로 팔을 벌리듯 감방이 나란히 배열된 2층 수용소가 봄빛 머금은 햇살에도 스산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수감자들이 입었던 죄수복이며 고문 기구, 북쪽 담 옆에 있는 사형장까지 일제 치하의 모습 고스란히 남아있기에 더더욱 그렇다.

안 의사를 비롯한 항일운동가들이 어떤 고초를 겪었을지 충분히 미뤄 짐작할 수 있을 만큼 악명 높았던 뤼순 감옥은 잘 보존돼 있다.

안 의사가 수감됐던 감방이며 교수형에 처해졌던 처형장도 원형을 간직하고 있다.
일제가 물러간 뒤 중국 정부는 뤼순 감옥을 옛 모습 그대로 복원, '뤼순 일아(日俄)감옥 구지(舊地) 박물관'으로 명명, 관리해왔다.

뤼순이 군사기지라는 이유로 외국인의 접근을 통제했던 중국 정부는 2008년 뤼순 감옥에 대해 제한적인 관람을 허용한 데 이어 지난해부터는 전면 개방했다.

그뿐만 아니라 뤼순감옥 내에 '국제 항일열사 기념관'과 안 의사 추모관 건립도 허용했다.
광복회 등의 예산 지원으로 지난해 10월 안 의사 의거 100주년을 맞아 개관한 기념관에는 안 의사와 신채호 선생, 이회영 선생 등 뤼순 감옥에 투옥됐다 숨진 독립투사 11명의 흉상과 사료들이 전시돼 있다.

비록 그의 유골을 찾을 길은 희미해졌지만 안 의사를 비롯해 독립운동가들의 숭고한 넋을 기리고 그들의 애국사상을 떠올려 반추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된 것이다.

소수민족 문제에 민감한 중국 당국이 200만 명에 이르는 조선족의 민족 감정을 자극할 수도 있는 안 의사 추모관과 항일운동가 기념관 건립을 허용한 것은 상당히 파격적이다.

그가 한국인뿐 아니라 중국인들에게도 '영웅'으로 인정받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쑨원(孫文)과 저우언라이(周恩來) 등 중국의 저명인사들이 앞다퉈 그의 기개를 높이 평가하며 추모의 글을 남겼다. 지금도 중국인들에게 안 의사는 항일운동의 선봉장이자 동양 평화론 주창자로 깊이 각인돼 있다.

그럼에도 지난해 하얼빈의 안 의사 의거 100주년 기념행사가 우여곡절 끝에 비공식적으로 조촐하게 치러졌다는 사실은 우리가 냉정하게 곱씹어야 할 대목이다.

소수민족의 분리독립에 민감한 중국 당국은 한국인이나 조선족에 의해 안 의사가 '조선의 항일운동가'로 불리는 것을 원치 않는다.

'자국인'인 조선족의 민족 감정을 자극하거나 한국인들의 애국주의에 불을 댕기는 기폭제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하는 것이다.

익명을 요구한 중국의 안중근 기념사업회 관계자는 21일 "백두산과 간도가 한국 땅이라는 주장이 제기되는 데 자극받아 중국이 동북공정에 나섰다"며 "안 의사로 말미암아 한국 민족주의자들의 목소리가 커지게 되면 어떤 주장이 나올지 모른다고 우려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중국은 안 의사가 한국 민족주의 상징으로 부각되는 것을 원치 않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 관계자는 해법도 제시했다.
"한국인으로서는 침략의 원흉 이토를 사살한 통쾌한 거사에 초점을 맞추고 싶겠지만 중국인들도 충분히 공유할 수 있는 방식으로 다가서야 한다"며 "민족적 접근이 아니라 그가 마지막 집필에 몰두했던 동양 평화론에 대해 연구한다면 중국도 흔쾌히 받아들이고 공조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안중근 연구가도 "기념일만 되면 일회성 대규모 행사를 여는 것은 오히려 중국만 자극할 뿐"이라며 "안 의사가 살아생전 염원했던 동양 평화 사상을 계승, 발전시킬 수 있는 차분하고 지속적인 노력이 오히려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제는 안 의사를 '테러리스트'가 아닌 '동양 평화 사상가'로 새롭게 부활시켜야 한다"며 "그것이 안 의사를 '불멸의 영혼'으로 남게 하는 길"이라고 강조했다.